적응적 시장 가설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워크
# 현대 경제학과 효율적 시장 가설
효율적 시장 가설은 기존의 현대 경제학 체계에 매우 뿌리 깊게 박혀있는 이념이다. 효율적 시장 가설은 기본적으로 인간은 합리적인 주체이기 때문에 금융시장에서는 모든 정보가 즉각적으로 반영되며, 따라서 가격은 랜덤워크를 따르고 결국 금융시장에서 예측 행위를 통한 수익 창출의 기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효율적 시장 가설의 아버지, 유진 파마(Eugene Fama) 교수는 "가격에는 모든 정보가 반영되어 있다."라는 한 마디로 효율적 시장 가설의 아이디어를 정리했다.
이러한 효율적 시장 가설의 아이디어가 탄생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현대 경제학이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물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경제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생각할 때 추상적인 이론과 수학적 모델을 먼저 떠올린다. 경제학은 대체 언제부터 이러한 수학적 엄밀성을 요구하는 학문이 되었을까? 경제학이 이러한 특징을 갖게 된 이유는 바로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의 절대적인 영향력 때문이다.
1947년 새뮤얼슨은 그의 박사 논문을 발표했는데, 짐짓 오만하면서 대담해 보이기도 하는 그의 논문 제목은 바로 「경제 분석의 기초(Foundations of Economic Analysis)」였다. 그는 수리물리학의 방법론을 경제분석에 대거 도입했고, 매우 형식적인 수학적 프레임워크를 통해 경제학을 분석해나가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그의 경제학적 분석은 마치 현대 물리학의 방식과 매우 유사했다. 이러한 그의 분석 스타일이 결코 우연에 의한 결과는 아니었다. 실제로 새뮤얼슨은 수리물리학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경제학에 적용되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논문 주석에서 자신의 경제학적 분석이 근본적으로 열역학의 기법과 비슷하다고 당당히 밝혔다. 새뮤얼슨은 이처럼 물리학에 기반한 경제분석의 프레임워크를 완성하였고, 새뮤얼슨 이후의 모든 경제학 논문들은 그를 따라 물리학적 방법론을 빌려 합리적 기대 이론과 효율적 시장 가설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인간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존재하는 경제 시스템이 어디 물리학적 법칙과 같은 일관성을 보이는 것이던가? 인간들의 상호작용과 감정, 그리고 그에 따른 수만 가지 의사결정은 원자들의 움직임보다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결국 경제 시스템과 금융시장은 몇 가지 절대 원칙들에 의해 정리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의 행위는 매우 휴리스틱적이고 같은 상황과 조건이라도 감정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의 상호작용을 물리학적 원칙에 기반해 모델링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효율적 시장 가설은 점점 그 아성에 도전을 받게 된다.
# 효율적 시장 가설에 대한 비판
효율적 시장 가설은 겉보기에는 매우 그럴듯해 보이며 논리의 전개 과정 또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효율적 시장 가설은 몇몇 경제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 이유는 효율적 시장 가설이 실제 금융시장의 현실과 시장 참여자들의 행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심리학에 기반하여 경제적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에서는 효율적 시장 가설이 말하는 완전한 합리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인 다니엘 카너먼(Daniel Kahnemen)과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는 각종 실험을 통해 불확실한 상황 하에서 인간의 의사결정은 구조적으로 비이성적인 패턴을 보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인간의 행동 패턴은 결코 효율적 시장 가설 학파가 주장하는 효용 함수의 최적화는 매우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투자자들은 비이성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비이성적 행동 패턴이 금융시장에서 생각보다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이러한 투자자들의 비이성적 행동 패턴을 인지적 편향(Cognitive Bias)이라고 불렀는데, 사람들이 비합리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과신, 과잉반응, 손실회피 성향, 심리 계좌, 군집 효과 등의 각종 인지적 편향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또한 경제학자인 샌포드 그로스먼(Sanford Grossman)과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이에 한 술 더 떠서 만약 효율적 시장 가설의 논리가 맞다면 시장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했다.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한 이유는 만약 시장에 수익 창출의 기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굳이 시장에서 거래를 할 유인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시장에는 어떠한 거래도 발생하지 않아 결국 그 시장은 본질적으로 시장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효율적 시장 가설을 반박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는 바로 1998년 발생한 LTCM의 몰락일 것이다. 98년 러시아 정부의 모라토리엄 선언은 러시아 국채를 일순간에 휴지조각으로 만들었고 글로벌 채권 시장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러시아 정부의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글로벌 채권들의 가격은 말이 안 될 정도로 엄청난 괴리를 보였다. 다시 말해 채권들 간의 스프레드가 매우 비이성적으로 벌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스프레드 수준은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엄청난 차익거래의 기회였다. 하지만 공포에 휩싸인 투자자들은 아무도 이러한 차익거래의 기회를 향유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하여 이러한 괴리 수준을 더 큰 폭으로 증가시켰다. 결국 시장 참여자들의 이러한 비이성적 행동 패턴에 의해 시장의 유동성은 메말랐고 괴리는 더욱더 확대되며 많은 투자자들이 큰 손해를 보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파멸의 근본적인 원인은 궁극적으로 시장 참여자들의 비이성적 행동 때문이었고, 정규분포 곡선의 위대함을 찬양하던 LTCM은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LTCM의 몰락이 시사하는 바는 결국 시장에 패닉이 오면 시장 참여자들의 비이성적 행위가 이성적 행위를 충분히 압도하고도 남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LTCM을 비롯한 각종 금융위기에 대한 역사적 사례들은 효율적 시장 가설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주장이 옳은 주장인가? 시장 참여자들은 합리적이며 따라서 시장은 효율적이라고 주장하는 효율적 시장 가설 학파인가, 아니면 인간의 뇌 구조는 구조적으로 비합리적으로 설계되어 있기에 금융시장 또한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하는 행동경제학인가? 이러한 논쟁에 대해 수많은 학계 및 업계 전문가들이 끊임없는 토론을 벌였지만 누가 옳은지에 대해서는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사실 두 가지 주장 모두 다 꽤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를 놓고 싸우는 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정답 없는 싸움판에 "바보들아, 결론은 짬짜면이야."라고 외치는 한 사나이가 혜성처럼 등판한다.
# 적응적 시장 가설,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하나의 프레임워크로 통합하다
시장의 효율성에 대한 이러한 이분법적 논쟁 속에서 MIT의 앤드류 로(Andrew W. Lo) 교수는 기존의 틀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새로운 방향의 프레임워크를 제시한다. 바로 효율적 시장 가설과 행동경제학, 두 가지 모두를 통합하는 이른바 적응적 시장 가설(AMH; Adaptive Market Hypothesis)이다.
적응적 시장 가설은 기본적으로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금융시장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기존의 물리학적 관점이 아닌 생물학적 관점에서 금융시장을 해석할 것을 주장한다. 적응적 시장 가설이 말하고자 하는 요체는 유기체인 생물체가 계속 환경 변화에 따라 적응해가고 진화해나가는 것처럼 시장 또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즉,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한 경쟁, 진화, 재생산을 해나가는 것과 같이 새로운 시장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투자자들은 멸종하고 또 언젠가는 그러한 환경에 적응한 새로운 투자자의 종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적응적 시장 가설은 시장이 효율적이냐 비효율적이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판단해서는 안 되며 현재의 시장이 얼마나 효율적인가, 즉 효율성의 정도를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적응적 시장 가설에서 합리적, 비합리적이라는 단어는 적응적, 부적응적이라는 언어로 대체된다. 변화하는 시장에 적응을 해나가는 투자자들은 적응적(Adaptive)이고 합리적인 개체들이며, 반대로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류는 비합리적이고 부적응적(Mal-Adaptive)인 개체들인 것이다. 결국 시장의 알파는 존재하지만 상황에 따라 알파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는 것이 적응적 시장 가설의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각종 헤지펀드들의 부침, 그리고 알파를 추구하는 트레이딩 전략의 효과가 가변성을 보이는 것을 매우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앤드류 로 교수의 적응적 시장 가설은 정반합으로 대표되는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를 금융 철학의 세계에서 오롯이 구현해내고 있다. 적응적 시장 가설의 논리는 그 자체로 새로운 혁신인 셈이다.
또한 적응적 시장 가설은 이분법적인 흑백논리가 아닌 음양 이론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기존의 주장들은 시장이 효율적이냐 비효율적이냐를 담판 짓기 위해 설전을 벌였다면, 적응적 시장 가설은 시장 환경의 변화에 따라 시장이 때로는 효율적일 수 있고 때로는 비효율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효율적 시장 가설이나 행동경제학이 시장을 고정 불변하는 정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데 반해, 적응적 시장 가설은 시장을 연속적이고 동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 결국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45억 년에 달하는 지구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생물종들이 생겨나고 또 멸종했는가. 진화론적 관점에서 생태계를 바라보면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월만즉휴(月滿則虧)라 하였다. 달도 차면 기울고 또 비어있던 달은 서서히 차오르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결국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절대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고대 로마의 군인이었던 플리니우스는 혼자만의 힘으로 「박물지」라는 백과사전을 편찬하였는데, 거기에 "오직 확실한 것은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 하나뿐이다."라고 적었다.
적응적 시장 가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변화에 적응하라"라는 것이다. 현재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트레이딩 전략도 어느 순간 시장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별 볼일 없는 전략이 될 수 있으며, 현재는 별로인 전략도 그에 맞는 시장 상황이 도래하면 언제든지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트레이딩은 생존 게임이다. 따라서 금융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매 순간 시장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사람이 강한 것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무엇인가? 소설 「상도(商道」에서 거상 임상옥은 돈을 벌 때마다 항상 계영배(戒盈杯)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계영배는 한자 그대로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는 술잔이다. 임상옥은 월만즉휴의 이치를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던 듯하다. 지금 잘 나간다고 해서 위세를 떨 필요도 없고 지금 못 나간다고 해서 주눅 들어 있을 필요도 없다. 결국 부족한 부분은 채우되 과도한 부분은 덜어내야 한다. 변화에 적응하고 싶다면 말이다. 우리 또한 계영배를 보며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금융시장의 카멜레온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