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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 Mar 08. 2021

배나온 중년이지만 감사합니다.

똥배는 슬금슬금


슬금슬금 나오던 아랫배가 이제는 제법 묵직하다. 오랜 시간 자리에 앉아있으니 갈수록 그 위세를 더한다. 40대 초반까지도 슬림했던 배가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 며칠 운동으로는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해외 출장 중에 아울렛에서 큰 맘먹고 구입했던 비싼 허리벨트는 허리에 안맞아 입맛만 다시고 있다. 나는 중년이 되어도 배가 안나올 줄 알았다.

70kg대를 유지하던 몸무게가 80kg을 살짝 넘기더니 내려갈 줄 모른다.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으로 운동(미식축구)을 했던 터라 중년이 되어도 적정 몸무게는 유지할 줄 알았다. 



흰 털이 솔솔


어머님은 70이신데도 머리가 검으시다. 그래서 내게는 흰머리는 안 올 줄 알았다. 구레나룻에 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수염, 눈썹에도 흰 털이 보이기 시작한다. 세월이 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오는 백발 막으렸더니, 제 알고 알아서 오고 있다.*' 흰머리는 내게는 안오는 줄 알았다.


* 탄로가(嘆老歌)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저질 체력의 중년


대학에서 운동 동아리 활동을 했고, 평소에도 헬스를 즐기는 편이어서 체력은 자신있었다. 40대 후반이 되면서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집에 들어가면 자기 바쁘다. 브런치 글을 쓰겠다고 PC 앞에 잠시 앉지만 어느새 침대로 향한다. 주말에는 밀린 잠을 보충해주어야 한다. 체력이 좋았던 탄탄한 청년은 어디 가고, 저질 체력의 중년만 남았다. 나는 중년이 되어도 체력이 좋을 줄 알았다. 






첫째, 여전히 직장을 다닐 수 있음이 감사하다.


사법고시에 3번째 떨어지는 날 취업을 결심했다. 시험 준비로 인생을 낭비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 때 원서를 넣은 것이 지금의 직장이다. 이렇게 한 직장을 20년 다닐 줄은 몰랐다. 회사는 아무것도 모르던 신입사원을 받아서 사람구실할 만큼 키워주었다.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으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나마 다닐 수 있는 직장이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둘째, 햇빛이 들어오는 집에 살고 있어서 감사하다.


90년대 후반이었다. 아버지가 뇌손상으로 전신불수(全身不隨)가 되시면서 한꺼번에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채권자들은 가족의 모든 것을 가져갔다. 반지하로 이사를 했다. 낮에도 불을 켜야 생활할 수 있었다. 햇빛이 안 들어 벽지에는 곰팡이가 슬었다. 화장실이 바깥에 있어 세입자들이 공동으로 쓰던 집이었다. 겨울에도 샤워를 하려면 마당에 위치한 창고로 나가야 했다. 얼음장 같은 찬물로 고양이 샤워를 했다.

 

어느 날 새벽 반지하 집으로 물이 들이치기 시작했다. 폭우였다. 근처에 강이 범람했다고 했다. 가족들이 피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짐을 챙기셨다. 전신불수였던 아버지를 휠체어에 앉혀드렸다. 소나기를 쫄딱 맞으면서 근육이 굳어버린 아버지의 몸을 휠체어에 구겨 넣었다. 아버지는 못 움직이시면서도 '으어!으어!' 불편함을 호소하시면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셨다. 우산을 목덜미에 끼고, 휠체어를 밀면서 언덕 위에 위치한 임시대피처로 향했다.

 

도로 턱에 휠체어가 걸리면서 아버지가 바닥으로 쏟아지셨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나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무 서러워서 바닥에 주저앉아 하늘을 원망하면서 울었다. 빗물과 눈물이 뒤범벅되었다.

'저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이제...이제...그만... 그만 좀 그만하십시오.' 

너무 힘들어서 미친듯이 하늘에 소리를 질렀다. 절망에 몸부림쳤던 것 같다. 기억은 여기까지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누군가 지나가다가 우리 부자(父子)를 도와주셨던 것 같다. 그 후로도 아버지는 7년을 전신불수 상태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집에는 좋은 기억이 없다. 따뜻한 추억도 없다. 춥거나, 푸세식 화장실이거나, 반지하거나, 내 방이 없거나, 곰팡이가 슬었거나, 부끄러워서 친구들을 데려올 수 없거나... 아무튼 좀 그랬다.


결혼 후 17평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조금씩 평수를 늘려갔고 지금은 30평대 집에서 살고 있다. 더 좋은 집에 살고 계신 분들도 있겠지만 지금의 집이 감사하다. 비가 많이 온다고 물이 들이치지 않는다. 따뜻한 햇볕이 들어오는 남향집이다. 안에도 화장실이 있고, 겨울에도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한다. 지금은 당연히 누리는 호사지만 유년, 청년 시절을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다. 햇볕을 보듬은 집에 살고 있어서 감사하다.



셋째, 내게는 사랑스러운 가족이 있다.


아버님이 아프실 때는 연애를 멀리했다. 처절함으로 하루를 버터내던 나에게 연애는 호사라고 생각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마음에 사람을 들일 수가 있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가정을 꾸렸다. 아이들은 건강하게 따뜻한 아이들로 자라주고 있다.


멕시코에서 주재원 생활을 하는데 일과 사람관계가 만만치 않았다. 가족은 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위로가 되어 주었다. 마음에 감기가 찾아오는 순간에 가족은 약이 되어주었다. 주재원 생활을 잘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부족한 아빠를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어 감사하다.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다. 지금이 좋은데요? 


우리는 가끔 20대로 되돌아간다면...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나는 싫다.

배는 나오고, 저질 체력에, 

노안이 와서 안경을 벗어야 스마트폰 메시지가 보이는 중년이지만 

지금이 좋다.

10대와 20대 시절의 치열한 순간들을 다시 이겨낼 자신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달콤한지를 알아버렸다.

나는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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