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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 Feb 04. 2022

인생을 3번 살고 싶다.

김 부장의 인생 3모작

시대의 멘토, 102세 김형석 교수님


유튜브 알고리즘이 '김형석 교수님' 강의로 이끌었다. 신기한 알고리즘이다. 최근 유튜브 영상을 편식하고 있었다. 재테크, 부동산, 주식, ETF, 연금, 노후 준비에 대한 영상을 골라봤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김 부장의 영상 편식이 걱정되었나 보다. 대한민국의 스승 김형석 교수님 강의 영상이 추천되었다. 기대 없이 가볍게 볼까 하는 생각에 클릭했다.


김형석 교수님 강의 중에 '인생을 3단계로 나누어 계획하라'는 조언이 다가왔다. 태어나서 취업전까지는 '학생', 취업 후 은퇴 전까지는 '직장인', 은퇴후에는 '사회인'으로서 3가지의 인행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드는 조언이었다. 곰곰이 김 부장의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았다. 김 부장이 살아갈 내일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I0fYvPKOKI



영상을 보고 느끼는 바가 컸다. 노트북 앞에 앉았다. 김 부장의 인생을 3조각으로 분류했다. 지나간 인생을 정리했다. 앞으로 다가올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김 부장의 인생 3모작>

공부하고 학습하는 시간을 보냈다. 김 부장은 '국민학교' 세대다. 당시에는 아이들이 참 많았다. 한 학년만 해도 15개 반 정도가 있었다. 한 반에 보통 60여 명이 공부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오전반/오후반으로 나누어서 다녔다. 한 학교를 오전 오후로 나누어 썼다.


당시 매년 100만 수험생이라고 했다. 90년도 말에 시행된 학력고사는 역대 최고 난이도의 수학시험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김 부장은 어려운 수학 문제 덕분에 대학에 합격했다. 주관식 몇 개를 찍었는데 운좋게 맞추었다. 남들 가는 시기에 군대도 다녀왔다.


사법고시에 도전했다. 아버지 사업실패와 병환으로 기울어진 집안을 일으키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다. 당시 법학과 한 학년당 30여 명이 합격하던 시절이다.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교만함이 넘쳤다. 3년 연속 떨어졌다. 공부를 지속할 수 있는 자금이 더 이상 없었다. 마지막 사법시험을 보던 날 동생이 찾아왔다. 밥을 사준다면서 데리고 나갔다. 동생은 봉투를 하나 건넸다. 자신의 월급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3번째 떨어진 날 이제는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님이 쓰러지신 후 가세가 확 기울었다. 복학 후 등록금을 내지 못할 정도였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을 벌었다. 장학금을 받아야 해서 독하게 공부했던 시절이다. 새벽에 가장 먼저 도서관의 불을 켰다. 겨우 겨우 대학 졸업장을 얻었다.

 

아버님의 10년 병환(뇌병변)은 가족의 행복을 무너뜨렸다. 가난하고 고단한 삶이 시작되었다. 반지하에서 버티어내야 했다.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선배들이 사물함에 버리고 간 교재를 주워 공부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가장인 내 건강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 노이로제를 가지고 있다. 가장의 부재가 얼마나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지 경험했기 때문이다. 다시는 가난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렇게 발버둥치며 오늘을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공부하는 시기를 보냈다. 2모작의 시기를 준비했다.




사법시험에 3번 떨어졌다. 직장을 구하기 시작했다. 2000년은 IMF가 끝나고 고용 시장이 회복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운좋게도 많은 곳에서 합격 소식이 들렸다. 지금 회사를 선택했다. 직장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첫 직장을 20년 이상 다니게 될 것이라고 생각 못했다. 지금도 다니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분에 넘치게 좋은 아내를 만났다. 어렵게 결혼할 수 있었다. 당시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없었다. 아버님 병치료에 받은 월급을 다 써야만 했다. 아내는 재물보다는 오로지 사람만 보아주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참 감사한 일이다. 직장에서는 열심히 하는(일 잘하는) 직장인으로 인정받았다. 존경하는 선배라고 이야기해주는 후배들도 있다. 감사하게도 인사/노무/기획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다. 


2번이나 주재원을 경험한다. 아이들은 해외에서 공부하면서 외국어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김 부장도 다양한 언어에 노출되었다.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외국어 공부가 취미가 되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일하면서 논문 쓰느라고 고생했지만 첫 번째 저작물이 나왔다. 직장생활 20년 차가 되었다. 아내는 "20년차 기념으로 선물해줄 테니 뭐 필요한 것이 있냐?"라고 물었다. 사라져 버릴 념으로 받고 싶지 않았다. 나를 위한 선물을 받고 싶었다. 책을 쓰기로 했다.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만들자. 그렇게 '일 잘하는 사람은 글을 잘 씁니다'가 상에 나왔다.


앞으로 직장생활이 10년 정도 남았다(내 기대대로라면).  김 부장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남은 직장생활을 통해 선한 영향을 끼치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박사 공부도 해보고 싶다.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은 이랬으면 좋겠다.

2065년 10월 소슬함이 찾아온 가을이다.
아내와 간단하게 저녁을 먹는다. 식후에 차 한잔 하면서 옛날 추억을 곱씹는다.
딸의 전화가 온다. 딸도 이제 50대 중반이다. 딸은 '운동은 하는지, 영양제는 먹는지'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같이 있던 손녀도 영상으로 안부를 전해온다. 손녀에게 '직장생활은 어떤지' 묻곤 잔잔하게 미소 짓는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든다. 다음 날 일어나지 못한다. 조용히 잠자듯 세상과 작별한다.
떠나는 그날, 내 인생이 누군가에게는 감동이 되는 스토리가 되었길 간절하게 소망한다.


김형석 교수님은 대부분 사람이 '은퇴 후 세 번째 인생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다'라고 지적한다. 나도 그랬다.

2모작에 뼈를 갈아넣고 있다. 직장생활에 승부를 걸고 있다. 여전히 성공을 꿈꾼다. 부자가 되는 것을 열망한다. 은퇴 후 3번째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김형석 교수님 덕분에 은퇴 후

'사회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
세상에 의미있는 지식과 콘텐츠를 생산하여 공유하고 싶다.
글쓰기를 통해 선한 영향을 미치고 싶다.
젊은 세대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
새로운 인생을 위해 도전하는 삶을 살고 싶다.
누군가를 돕는 사회공헌 활동에 참여하겠다.
글로벌과 연계된 NPO(Non Profit Organization)를 통해 창직(創職)하고 싶다. 창직을 통해 노후 준비가 부족한 선후배들에게 일하는 즐거움을 주고 싶다.  
30여 년의 직장생활에서 얻는 경험으로 경영과 자기 계발 코치가 되고 싶다.
60세 이후에도 성장이 가능한 삶을 살고 싶다.


인생 3모작을 메모하여 수첩(플래너)에 붙여두었다.

아직 완성된 답은 없다. 은퇴 후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에 대해서 계속 고민할 것이다.


당신은 3모작을 하고 있나요?

당신의 은퇴 후 삶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김 부장이 수첩에 붙여둔 인생 3모작 플랜>

세상과 작별한 시간을 정해두었다. 하나님께서 괘씸하게 생각하실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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