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부러진 이야기
강습을 맡은 선생님은 서핑이 얼마나 위험한 운동인지 끊임없이 강조했다. “보드와 발목을 묶어놓은 줄이 꼬인 상태에서 파도가 들어왔다 나가면 살이 찢긴다”, “보드 아래에 달린 핀에 살이 썰린다” 같은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서핑은 익스트림 스포츠예요오. 조심하셔야 돼요오” 말꼬리를 길게 빼는 타성에 젖은 목소리에 오히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얼마나 많이 반복했으면 저렇게 영혼이 다 없어졌을까. 나는 절대 흘려 듣지 말고, 조심 또 조심해야지. 조심해서 나쁠 게 없으니까. 나는 다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파도는 힘이 셌고, 우리를 봐 줄 선생님은 모자랐다. 우리는 몇 번 물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파도에 내동댕이 쳐지며 강습을 마감했다.
처음엔 보드를 더 타지 않을 생각이었다. 파도가 무섭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물 먹은 보드가 너무너무너무 너무너무너무너무 무거워서 싫었다. 보드를 들고 해변을 걷는 게 너무 익스트림해서 익스트림 스포츠인가 싶을 만큼 무거웠는데 여기까지 와서 잠깐 강습만 받고 마는 게 아쉽기는 했다.
마음을 고쳐 먹고 보드를 빌려 바다로 나갔다. 강습을 받던 어제와는 다르게 바다는 잔잔했다. 잔잔하다 못해 고요했다. 파도가 있어야 서핑을 하는데 둥둥 떠 있기만 몇 십 분이었다. 누워 있기가 지루해 물 밖으로 나가려고 보드를 해변 쪽으로 밀었다. 그 순간이었다.
보드가 뒤집혔다.
해변에서 부서지던 파도는 어제에 비해 귀여운 수준이었지만 보드가 뒤집히기엔 충분한 모양이었다.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보드를 손으로 막은 것 같다. 아마도 반사적이었을 것이고, 그 반사 신경은 어제의 다치지 않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보드가 뒤집히는 것은 위험하므로 그 위험을 막아보겠다는 깜찍한 요량. 살이 찢기고 썰리는 것을 막으려고 손을 뻗었고, 보드를 마중 나간 검지 손가락은 그토록 평화로운 바다에서 뒤로 꺾였다.
의사의 입에서 “손가락이 부러졌네요” 라는 진단을 받기 전까지 나는 부상의 정도가 골절보다는 훨씬 가벼울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파도는 크지 않았고, 아프긴 하지만 참을 만 했으며 나는 다치지 않기로 결심했었으니까.
조금 억울했다. 파도라도 타다가 뒤집어 졌다거나, 누군가와 부딪혔다거나, 조심하지 않았다거나, 무리했다거나, 위험을 무릅썼다가 다쳤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만큼 다쳐 본 적이 없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고, 부상도 당하는 사람이 당하는 거 아니었어? 나는 조심하지 않는 사람이나 다친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엄마가 나의 어린 시절을 설명할 때 꼭 하는 이야기가 있다. 4남매 중 나머지 셋과는 다르게 어린 시절에 내가 길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언니들과 동생은 모두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져 엄마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든 에피소드가 있지만 나는 없다는 이야기.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까지만 갔다가 늦지않게 돌아오는 꼬맹이를 엄마는 ‘똑똑한 내 새끼’의 증거로 보는 것 같지만 나는 그걸 ‘용기 부족’로 생각하곤 했다.
때로 나는 ‘용기 부족’을 ‘조심스러움’으로 치환하며 살았다. 용기가 부족해 알을 깨고 나오지 못했을지언정, 그 안에서 충분히 조심했으므로 이제껏 크게 다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고.
가만히 사람이 얼마나 조심할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보드를 손으로 막지 않았다면 다치지 않았겠지. 하지만 손을 썼는 줄도 몰랐다. 아침에 보드를 안 타겠다는 마음을 지켰어도 멀쩡했을 거다. 하지만 그럴거면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다. 아예 서핑을 배우지 않았어야 했다. 아니 양양에 가지 않고 집에 있었으면 아니아니지 이 위험한 세상에 태어나질 말았어야지.
다치지 않을 수 있었던 지점을 찾아 내 판단을 복기했지만 뭐든 하기로 한 이상 모든 것으로부터 안전할 수는 없었다.
손가락이 부러졌다. 내가 조심해도 사건은 일어났다. 시간이 지날 수록 부족했던 것은 조심스러움이 아니라 용기였나 싶다. 손가락 회복까지 3개월. 용기 부족은 고칠 수 있는 건지 물어볼 사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