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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림 Sep 28. 2015

소설이 소설로 읽히지 않을 때.

마르셀 서루 <먼 북쪽>

 

생각이 깊어지는 순간이 있다.

예컨대 음식을 먹다가 혹은 차를 마시다가 문득, 언제까지 이 땅에서 이것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언제까지 자연은 우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성내지 않고 제공해줄까.

어쩌면 이미 우리는 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잘못된 방향으로 와버린 건 아닐까.

지금 내가 작은 변화를 감내 한들 뭐가 바뀌기는 할까. 같은 생각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맥이 풀린다.

 

 

백 투 더 퓨쳐 2에서 브라운 박사가 떠난 미래였던 2015가 현실 세계인 그 날이 왔다.

온갖 디지털기기가 상용화되었고, 열감지와 지문인식을 실제로 사용하고 있으며 

자동으로 건조기능이 실행되는 옷 따위는 없지만 어쨌거나 엄청난 과학과 문명의 발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발달이 과연 우리에게 좋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점점 커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 더 느린 삶, 조금 더 불편한 삶의 가치가 더 크게 다가온다.

 

 

 


여행을 떠나기 전 책방에 들러 신간을 살폈는데 눈길을 잡아 끄는 표지가 하나 있었다.

하얀 표지에 점처럼 걸어가는 작은 뒷모습.

뒤도 눈밭처럼 하얗고, 향하는 곳도 뿌옇고 어두운 산맥의 형상의 있을 뿐.

묘하게 어두운, 우울한 느낌을 주는 표지였다.

 

 

  

하루키가 개인적인 친분으로 소개받아 이 책을 읽기 시작한 후 (작가의 아버지와의 친분) 단숨에 다 읽어버리고 직접 번역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어 번역을 한 것으로 더 유명세를 탄 이 책은 하루키의 말마따나 "의외성"으로 가득 찬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랄까. 

읽으면서 도대체 이건 어느 시대 이야기일까, 먼 미래일까 가까운 미래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읽다가 점점 그 생각은 두려움으로 변한다. 

생각보다 가까운 미래에 정말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두려움.

소설 속 그 어디에서도 시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이것이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만들어진 이야기는 아니라는 느낌은 확실히 주기 때문이다.

그때부터는 소설이 소설로 읽히지 않기에 조금씩 우울해진다.

하루키는, 공교롭게도 이 소설을 번역하고자 마음을 먹은 것이 2010년 여름이고, 번역된 책이 나온 것은 2012년이기에 그 전에 읽기에도 무거웠던 이 이야기는 2011년 3월에 일본을 덮친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폭발로 인해 한층 더 무거운 주제가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아무런 내용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읽기를 부탁하고 있다.

나도 서점 신간 코너에서 표지만 보고 사들고 왔기 때문에 정말이지 아무런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줄거리나 작가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끝까지 읽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내 주위의 책 읽기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들에게 모두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읽고 나서 함께 대화하자고 청하고 싶다.

 

어쩌면 이 소설의 시작이자 동기가 되었을, 하루키가 번역후기에서 인용한 마르셀 서루가 직접 쓴 글 중 한 부분을 옮겨본다.

 

 

예전에는 본능이 담당하던 자연 본래적 절차와의 관계성을 우리 다수가 이미 잃었다고 느꼈다.
우리는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일반적이지 않은 것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이 역사적 순간에 삶을 부여받았다는 순수한 우연을, 너무나도 당연히 여겨왔다.
몇 세기에 걸친 기술 혁신이 있었고, 투자가 있었고,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지구 자원을 마치 '물처럼' 써왔다. 그 덕에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추위도 더위도 느끼지 않고, 자동차 엔진과 전화기의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냉장고 안의 식품이 어떻게 해서 여기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부자연스러움을 편리함이라는 이유로 합리화시킨 채.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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