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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림 Sep 28. 2015

우리 모두는 시대의 기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2014. 여름



봄은 언제 우리 곁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나. 깜짝 놀랄 만큼 뜨거워진 한낮의 햇살 아래 잠시 스쳐가는 바람에 미소 짓는 것 조차 미안한, 그런 날들이 지나가고 있다.

이 봄에 우리나라에 벌어진 참사가 준 충격은 사고 후 두 달을 향해가는 시간에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누구에겐들 안 그럴까. 분노와 죄책감에서 시작된 무기력감에 힘든 하루를 보내는 국민이 비단 나 하나는 아닐 것이다. 

당연히 책에도 집중이 안되고 있던 중 묵직한 산문집을 하나 읽게 되었다. 

바로 황현산 교수의 <밤이  선생이다>이다.

작가인 황현산은 문학평론가이자 번역가이고, 교수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저자에 대해 전혀 몰랐던 이유는, 그가 이 책 전에는 문학에 관한 논문이나 문학비평책만 냈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그의 이 첫 산문집은 2000년대 초에 국민일보에 실었던 칼럼들과, 2008년부터 한겨레신문에 실은 칼럼들, 그리고 80년대와 90년대에 쓴 칼럼 몇 편을 묶어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난 글들이 섞여 있음에도 그 시간이 주는 간극이 전혀 느껴지지 않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이 많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사회에 발생되는 문제들이 현재의 모든 조건들에  맞아떨어졌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 속 이야기들은 물론이고, 근현대 작가들의 과거 글들 속에서도 그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사회문제 속에 담긴 인간의 본질적인 습성들과 마주하게 되고, 사람 보다 권력이나 돈이 먼저였던 슬픈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보며 우리는 무기력함과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의 사회는 안타깝게도 이런 감정을 너무나 빈번히 느끼게 만들고 있다. 너무나 많은 사고들이 나고, 너무나 많은 목숨이 불필요한 상황에 의해 사라져가며, 그 대처의 모습은 어이없게도 우리가 기록들을 통해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안되리라 다짐한 그 모습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점점 더 자기중심의 사회가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도, 타인의 불행에 깊이 공감하며 꾹꾹 눌러 쓴듯한 글들이 모여있는 이런 책이 있기에 우리는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을 수 있다. 

선생은 책 속에서,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며,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글을 쓰는 사람이 된다고 했다. 

요즘 시대로 본다면 비단 작가들 뿐 아니라 개인 홈페이지나블로그를 운영하는 이들, 또는 언제나 노트를 가지고 다니며 순간을 기록하는 습관을 지닌 이들은 그 마음속에 잊지 않으려는 열망이 있음이라는 이야기도 될 수 있겠다. 

우리 모두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의 말처럼 시대의 증언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가 후손들에게는 역사가 된다. 바르고 정직한 눈으로 시대를 바라보고, 살아내고, 기록하고, 증언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프리모 레비는 역설적으로 생존자는 진짜 증인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진짜증인은 돌아오지 못한 이들, 즉 그의 책 제목처럼 가라앉은 자들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입을 대신의 시대의 증언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책임을 피하려 하고, 누군가가 진실을 덮으려 한 들 증언하는 이들과 기록이 있는 한 그것이 성공한 예는 역사에 없었다. 

설령 그 세대에는 성공한다 할지라도 목소리 내길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있기에 언젠가 모두는 알게 될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힘없는 이들의 소중한 존재를 죄책감 없이 앗아간 일이 있었음을.


이 일을 해결할 수 있고, 해야 할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 애통해하는 사람들이 제풀에 지치고 릴레이를 하는 사람들의 힘이 바닥나고, 그래서 갑자기 국가의 품격이 높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살라는 대로 살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져봤자 결국은 저만 손해라는 것을 만천하에 똑똑히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러나 정작 비극은 그 다음에 올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다른 비슷한 사연을 지닌 동네와 거리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련된 빌딩과 고층 아파트들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 번들거리고 말쑥한 표정으로 치장"(진은영 시인, 용산 멜랑콜리아) 될 때 올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 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2009)




우연이라 아무도 당당히  말할 수 없는,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부처가 제 할 일을 하지 않아 야기된 안타까운 사고, 소외된 장소에서 쓸쓸히 투쟁하던 노동자들의 죽음을 보며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사회의 아픔 앞에 우왕좌왕 하는 우리는 어쩌면, 정의가 무엇인지를 잊어가며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지금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은 우리의 여정을 평화라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종교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반응 또한 극과 극으로 나누인다. 슬픈 자들과 함께 울고 불의에 함께 분노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지금이야말로 나라의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침묵해야 할 때라 말하는 자들도 있다. 

어떠한 쪽을 택해 행동해야  할지는 각자의 자유이겠으나 그 일이 나에게 닥쳤을 경우를 생각해야 함은 의무로 다가올 것이다.

나는 사실 저 단락의 마지막 문장에서 몸서리가 쳐졌다. 지금의 지독한 이기주의, 지독한 개인주의를 잔인하리만치 정확하게 바라본 문장이 아닌가. 

바로 옆에서 사람이 넘어져도 일으킬 줄 모르는 사람들. 앞서 들어간 사람이 놓아버린 문에 얼굴을 맞아 본 경험. 같은 교실에서 친구가 울 때 다가가 왜 울어  괜찮아?라고 묻는 아이가 없어지는 학교.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습성인 줄 알고 살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한 해 한 해 지날수록 더 처절히 깨닫는다. 

사람마다 정의감을 측정하는 수치가 있다면 좋겠다. 불의에 눈감고, 억울한 일을 당해 쓰러져 가는 이들을 돕지는 못할 망정 조롱하는 이가 있다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통찰력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장치가, 그런 통찰력이 내게 있다면 나는 조금은 약은 이가 되어 정의로운 사람들과만 어울려 살아가고 싶다. 이런 이기적인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는 것도 참 서글픈 일이다.




과거를 영예롭게도 비열하게도 만드는 것은 언제나 현재다. (2010)

현실을 현실 아닌 것으로 바꾸고, 역사의 사실을 사실 아닌 것으로 눈가림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상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비겁하기 때문이다. (2009)




과거가 현재였을 때 그 안의 나는 늘 외롭고 불안했는데, 현재가 되어 과거를 보니 당시와는 사뭇 다른 감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일어났던 일들이 바뀐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마도 과거 속의 나는 그때는 미래였던, 지금의 현재를 볼 수 없었기에 불안했나 보다. 

그래서 나는 과거를 완성하는 것은 현재란 작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자신의 이야기만 하거나, 결론까지 친절하게 내어주는 에세이는 나의 몸을 흘러 어디론가 나가버린다. 

순간 마음이 따스해지고 잊히는 글들보다 이렇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글들이 좋다. 이런 글들의 모음을 발견하고,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과거를 영예롭게도 비열하게도 만드는 것이 현재라면, 현재는 미래를 어떻게 투영할까. 지금 내가 살아가는 날들이 과거의 범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지금과 같은 잣대로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할 수 있을까.

조지 오웰은 남이 기사화되길 원치 않는 것을 보도하는 것이 '저널리즘'이며, 나머지 보도들은 결국 홍보라고 말했다. 홍보만을 일삼는 언론사들의 뉴스들을 접하며 분노를 넘어 허탈한 마음이 든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찬란한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이 아픔과 분노를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그것은 오롯이 잘못된 관습을 바꾸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에 달린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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