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헌정시_하

너에게 바치는 싸구려 사탕 한 줌

by 퀘이사


4.


그 애가 어둠속에서 눈을 꿈뻑거렸다. 한밤중에 내가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하는 습관일 게 뻔했다. 어쩌면 내일 아침에는 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왜 안 잤어?”

“자다 깬 거야, 빙신아. 다시 잘 거니까 신경 꺼.”


그 애가 부정확한 발음으로 뭐라고 더 말했는데, 잘 들리지는 않았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 애의 숨소리가 다시 가라앉는다. 평소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던 눈썹 꼬리가 처지면, 나는 울고 싶어진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애가 나를 떠나버려서 홀로 남겨진 내가 바보가 되는 것은 두렵지 않다. 그 애가 없던 나로 돌아가기는 어렵지 않다. 한 번 했던 짓은 두 번 하기 쉽지 않은가. 하지만 덜컥 겁이 나는 순간은 따로 있다. 그건 바로 그 애가 만들어 놓은 방공호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을 때다. 인간은 참으로 간사하다. 좁고 낡은 침대에 그 애와 함께 몸을 욱여넣는 밤이면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나가 죽어야겠다.”


나는 그때마다 잠든 그 애의 옆에서 비뚤어진 모양의 사랑을 고백했다. 일정한 숨소리를 가만히 듣다보면 다음 날, 그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도 밤을 새우고 싶어지는 나 자신에게 하는 소리기도 했다. <요한의 집>에서 보낸 열여덟 살까지의 밤에는 매일같이 ‘내일 제가 깨기 전에 지구를 없애주세요’ 같은 당찬 기도를 했던 주제에, 스물넷인 지금은 그 소원이 이제 와서 이루어질까봐 불안에 떨었다. 내 불규칙한 감정이 그 애에게 흘러 들어가서 단잠을 깨우면 어떡하나와 같은 고민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나는 숨을 입안으로 굴려 삼키고 쥐죽은 듯이 새 날을 기다렸다.


동 틀 녘에 그 애의 얼굴 위로 주황색 빛이 쏟아지는 것보다 성스러운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애는 분명 신의 총애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 애의 작은 뒤척임들이 내 신경을 되살리지 않겠는가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모레도 내일처럼 시작됐으면 좋겠다. 살고 싶다는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죽고 싶게 했다.


이런 사랑은 전하면 안 된다. 닳고 닳은 사랑은 짐 밖에는 되지 못해서 받는 사람에게도 낭패와 다름없다. 나는 내 사랑의 건조한 부스러기들을 양 손에 모아 수챗구멍에 물과 함께 흘려보낼 수밖에 없다. 내가 소리라면 너는 볼륨을 줄일까? 네 옆에 똑바로 누워 이불을 얼굴 끝까지 덮고 숨을 참는다. 곧 있으면 네가 깰 시간이었다. 너는 내가 깨지 않도록 아주 느리게 내 얼굴 위의 이불을 걷어주고, 싱크대에서 시원찮은 양치를 하겠지. 사실 그 시간동안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내가 그동안 날밤을 새운 것이 들통날 테니 나는 눈을 꾹 감은 채로 눈동자를 굴릴 뿐이었다.






5.


나는 그 애에게서 나는 먼지 냄새를 싫어했지만 그 애는 내게서 나는 착향료 냄새를 아주 좋아했다. 하여간 싸구려 취향이라며, 단맛이 그게 그거 아니냐며 질린 기색을 내보여도 그 애는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곤 했다. 늦은 사과인 건 나도 알지만, 어쨌든, 달게 살고 싶은 것이 네 잘못은 아닌데 내 말이 심했다는 걸 나도 인정한다. 내가 받은 네 마음이 모자랐던 것도 아니었는데. 후회해도 이미 늦은 뒤였다. 너는 정말 끝까지 신의 총애를 받았다.






6.


생각해보면 그 애가 중간이다. 내가 아니라. 사시사철을 남색 니트 하나로 버티는 그 애를 보면 대한민국에 날씨라고는 ‘환절기’ 하나 뿐인 줄만 알았다.


그 애의 머리는 검은색이었는데, 어찌나 검은지 빛이 닿으면 은색처럼 보이곤 했다. 햇빛 아래서 갈색으로 바래버리는 내 머리와는 아주 달랐다. 그 애의 남색 옷은 나무랄 데 없이 은색과 어울려서 나는 그 애가 늘 태양 아래에 서있기를 바랐다. 볕이 뜨거워 땀이 날 것 같다며 옷의 목덜미를 꼬집어 풀썩 거려도, 나는 그 애가 계속 그곳에 있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었던 것 같다. 그 애의 남색 옷은 두껍지 않으니까 해가 떠있는 반나절을 그 애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너 포도 좋아하지.”


언젠가 그 애가 현장에서 얻어온 거봉 세 알을 건넨 적이 있었다. 푹 익어 거의 새카매진 그것들을 보며, 나는 거봉 한 알이 저렇게 컸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안에 씨가 있기는 한데, 아주 달기는 하거든….”

“좋아해.”


이리 줘봐. 내 우악스러운 손짓에도 그 애는 활짝 웃었다. 그 애가 웃을 때면 내 심장이 발치까지 떨어져서 좀처럼 올라올 줄을 모르는데, 나는 그때부터 이 감정을 슬픔이라고 정의했던 것 같다. 내가 내민 손에 그 애가 거봉 세 알을 얹었다. 두 번 접힌 남색 옷의 소매 끝에는 보풀이 잔뜩 일어있었다. 생각보다도 더 얇은 옷감이었다. 나는 그 애가 더위를 탄다고 멋대로 판단하기로 했다.


학교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손에 쥐고 온 거봉 세 알 중 하나를 한 입에 넣고 씹었다. 너무 익어 꼭지 부분이 살짝 물렀을 정도였는데, 의외로 신맛이 났다. 이토록 새콤한 거봉은 먹어본 적이 없었다. 미간이 쪼그라들었다. 그 애는 운 좋게 단맛만 나는 거봉을 먹었던 것일까. 아니면 신맛을 모른 척했을까. 좀처럼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7.


환절기 밤은 쌀쌀하다 못해서 춥다. 집에 가는 길, 골목 바람에 등허리가 시린 나는 셔츠를 여몄다. 사거리 과일 트럭에서 거봉을 팔기에 두 송이를 샀다. 봉지에 손을 넣어 한 알을 딴 뒤, 꼭지 부분을 손등에 쓱쓱 닦았다. 그리고 입에 넣은 뒤에 씨를 뱉어내지도 않고 꼭꼭 씹어 먹었다. 단맛이 강한 거봉이었다.


한번 더 골목 바람이 불었고, 올려다 본 하늘은 검은 색에 가까운 남색이었다. 나는 그 애의 남색 옷이 싫었다.


여름은 그렇게 길었는데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은 무척이나 짧은 모양이었다. 길 끝의 은행나무는 절반 이상을 헐벗은 상태였다. 땅에 떨어진 누런 은행잎들위로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구역질이 났다. 졸업은 순전히 그 애를 위해서였다.


행복을 좇다가 도달한 곳이 환각 속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안의 무기력함마저도 사랑하게 된 이후에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수업이 없는 날, 늘어지는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깜깜해진 밖을 보는 게 더 이상 울적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가만히 누워 창문을 응시했다. 뜨는 해가 지는 해 같고, 지는 해가 뜨는 해 같으면 또 어떻겠는가. 그 애를 잊기 위해서는 잃어야 할 감각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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