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하 Sep 03. 2023

수정의 시작은 원고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쓰는 자의 일상 철학 065


1.

백지장에 점을 찍고 그 점과 점을 그어 선을 잇습니다. 다시 선과 선을 연결하면 면이 됩니다. 그 안에 원하는 색을 칠합니다. 그렇게 완성한 사각형 여섯 개를 붙여서 입체도형을 만듭니다. 

끝!!! 입체도형 만들기 참 쉽죠? 순서대로 따라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되는 겁니다. 


백지장을 펼쳐 점 하나를 어디에 찍을까 심사숙고합니다. 첫 단추가 중요하듯 첫 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다음 점의 위치가 정해지고, 선이 그어져서, 면을 만드니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면은 작고 크고 길쭉하고 널찍하고 다양해집니다.


일단 찍고 보자는 심정으로 가볍게 출발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점만 하나 찍으면 그다음 점은 위아래 좌우 대각선 규칙과 확장을 넘나들며 가속이 붙습니다. 처음 기획은 머리 아팠겠지만, 그다음부터는 어떻게든 풀립니다. 


2.

그런데...

이런 경우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주제도 목표도 없이 일단 시작했습니다. 결과를 염두하고 시작과 진행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다 보니 이렇게 저렇게 연결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막연하게 결과가 나왔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원했던 입체도형은 아니었지만 색칠까지 다했습니다.


그리고 뜬금없이 결과물을 내놓으며 고쳐주세요! 합니다. 그러면 입체도형을 펼치고 여섯 개의 면을 따로 떼어놓습니다. 면에 칠해진 색을 지우개로 지웁니다. 빡빡 문지릅니다. 휴, 수정도 하기 전에 지우느라 힘이 빠집니다. 색을 지운 얼룩덜룩한 면에서 삐뚤거리는 선을 다시 긋습니다. 수정해 주는 입장에서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여간 복잡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3.

기획과 구성, 목차를 정해 자료를 수집합니다. 한 꼭지 한 꼭지 주제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이제 초고를 묶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합니다. 원고 마감일까지 끝없이 수정합니다. 그나마 처음 기획 구성 주제가 뚜렷하니 그 안에서 움직입니다. 크게 틀과 영역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글 쓰는 사람과 그 원고를 수정하는 사람은 한결 수월해집니다. 물론 한 주제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갈등은 생길 것이고, 진행에 멈춤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공 많아 배가 산으로 향하는 상황은 아닙니다.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를 가지고 와서, 투고 전인데 수정 좀 해달랍니다.  나는 출판업자도 아니고 전문 출간업을 하는 사람도 아닌데 ‘내 책 좀 내달라’ 작업 문의가 들어옵니다. 책을 내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일단 설득합니다. 책을 쉽게 낼 수 있다고 믿는 자와 책을 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믿는 자. 대립은 여기서부터 벌어집니다. 


출간에 진심인 사람은 하나하나 차근히 짚고 나가려 할 것입니다. 오로지 책만 내는데 급한 사람은 내가 쓴 글 내가 내자는데 뭐가 문제냐 할 겁니다. 그런 면에서 부분 수정보다는 어쩌면 처음부터 하얀 도화지에 그리는 게 더 쉬울지 모르겠습니다. 어울리지 않은 모양과 색을 지우면 얼룩이 남습니다. 그곳을 덧칠하고 다시 오려내고 붙이고 해야 하는 수고를 더합니다. 


4.

나는 학교 다닐 때도 고분고분 말 잘 듣는 학생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이 ‘하자’ 하면 ‘왜요?’ 역으로 물었습니다. 누가 나에게 ‘이렇게 합시다!’ 하면 ‘꼭 해야 하나요?’ 반문하는 탓에 설득하고 동조를 구해야 했으니 참 피곤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런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돈 받고 하는 일이니 참고 견디자, 일은 일일뿐 머리에 되새김질하고 적합한 비유와 조언으로 글을 마무리시킵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기보다 유에서 다른 유로 변형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학생도 선생도 조언에 더 귀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도 지나치듯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 새깁니다. 이쯤 되면 참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대학에서 작법, 작문 뭐 이런 전공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개성 있는 글도, 나를 위한 글도 아닌, 그냥 뻔한 문장성분과 수식어를 곁들인 규칙에 맞는 문장 연습 시간이었습니다. 따로 글을 배우지 않던 유아기처럼 글짓기를 따로 배우지 않는 습작이었습니다.


내가 제2막 인생을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고 책을 내고 짬짬이 하던 원고 교정 교열 윤문 수정에 박차를 가할 때쯤 어디선가 예상치 못한 학생들이 튀어나옵니다. 나는 내 글에 대한 코칭, 공유, 합평에 있어서 거의 무경험자이며 이런 커뮤니티가 여전히 생소하고 낯섭니다. 


독학하듯 오로지 혼자 글을 써온 터라 기획자의 눈에는 투고를 위한 글에서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내가 남의 글을 투고를 위해 기획자의 눈이 되어야 합니다. 자존심을 구기지 않고, 자존감을 밟지 않는 선에서 싫은 내색 않고 ‘잘했습니다, 여기만 고치면 더 잘하겠습니다.’며 원고 주인, 고객 성향과 일의 방향을 꿰뚫어야 합니다.


진짜 잘하는 수정 작가는 바로 이런 겁니다. 상대를 알고 상대에 맞게 설득하고 일하는 것, 그래서 혼나는 사람이 나는 혼나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않는 것, 그런데 결국은 그 선생의 설득과 지시를 따르는 것.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이걸 참 잘하는 선생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 시작은 원고가 아니라 사람, 사람을 먼저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 어려운 것을 위해 나는 오늘도 내가 쓴 글을 읽고, 당신이 쓴 글을 읽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매년 5월 선하체로 글을 채워 내놓겠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