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쓰는 자의 일상 철학 048
1.
책을 낸 이후, 만나는 사람은 같지만 만나는 장소와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책이 나왔다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변한 것은 아닙니다. 취미로 끄적거리다가 좀 본격적으로 써보자 마음먹었을 때부터였습니다. 글을 쓰기 전에는 뭐가 맛있다 하면 그것을 먹기 위해 오픈 시간에 맞추어 가서는 줄을 섰습니다. 예쁘고 멋진 것을 살 수 있다 하면 그것을 사기 위해 오픈런너가 되었습니다.
2.
글을 쓰고부터는 만나는 사람들과 글 쓰는 이야기, 책 읽는 이야기를 조금씩 내비칩니다. 그리고 그런 관심의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더 자주 더 편해집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화려하고 시끄러운 곳을 피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블로그나 인스타에서 모임 장소를 검색할 때도 맛집 멋집 분위기 있는 카페가 아닙니다. 이제 산책로가 있는, 탁 트인 전망이 보이는, 스터디 가능한 뭐 이런 키워드로 장소를 검색합니다. 우연히 들른 곳에서도 다음에 혼자 와서 글을 쓰고 책을 읽을 공간이었다면 따로 기억해 둡니다.
무엇보다 오픈 시간이 이른 곳을 좋아합니다. 보통 내 나이또래가 진인을 만나거나 모임에 간다면 브런치 정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만나기 편한 시간대, 인기 있는 카페 안에는 오픈 런을 기다리는 백화점 손님처럼 경쟁하듯 줄을 서서 오픈과 동시에 테이블에 가득 들어선 손님들로 도깨비시장이 따로 없습니다.
아무리 분위기와 음식 맛이 좋아도 사람이 너무 붐비면 제값 주고 먹는데 홀대받는 기분이 듭니다. 밖에서 기다리는 손님을 위해 자리를 비워 주어야 한다는 조급함이 생겨 빨리 먹고 나옵니다.
3.
그럼에도 갔던 장소가 마음에 든다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 시간에 다시 혼자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정말 마음에 든 곳은 한 달 내내 모임 장소를 고정시킵니다. 나는 장소와 사물을 여러 번 가고 오래 지녀도 무르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다. 같은 공간 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함께 하는 사람이 바뀌니 그 분위기와 기분이 다르니까요.
이제 내 모임장소 기준은 달라졌습니다. 식당과 카페, 백화점 혹은 전시관 어디든 장소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변했다면 그 공간이 주는 분위기와 느낌입니다. 내 기분을 들뜨게 하고 흔들어놓는 곳, 남에게 보여주기 좋은 곳에서 벗어납니다. 나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곳으로 변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무조건 맛있는 집 멋진 집을 우선하지 않습니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소박하게 차려준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집, 내 목소리를 키우지 않아도 서로 눈 마주치고 숨소리 들을 수 있는 조용함이 어울리는 공간,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이런 장소는 미리미리 저장해 둡니다.
4.
내가 있는 이곳으로부터 나는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이지만 내가 어디 있느냐, 내가 머무는 공간에 따라 나는 다양한 나를 말합니다. 저녁시간 주방에 있는 나는 엄마입니다. 아이에게 맛있는 저녁상을 줄 최고 요리사가 됩니다. 나는 칠판 앞에 섰습니다. 학습목표를 정하고 그날 학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선생님입니다. 아파트 지하 체육관에 있습니다. 요즈 러닝크루에 들어갈 계획으로 하루 20분 러닝머신 위를 뜁니다.
조용함이 어울리는 산사나 일인 책방에서 나는 소음보다 침묵의 시간을 유지합니다. 흑과 백의 수묵화가 전시된 미술관에서 나는 형형색색 소란스러운 화려함을 뒤로하고 선명한 듯 온화한 듯 그려진 붓의 선을 향해 맑고 곧은 정신을 배웁니다. 수목원 꽃과 풀을 친구 삼아 걷다 보면 자연을 닮아 자연스러운 내 발걸음을 확인합니다.
그러니 좋은 친구를 사귀듯 좋은 곳을 찾아가야겠습니다.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내가 여행보다 선물보다 가볍게 누릴 수 있는 지금의 호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