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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하 Sep 17. 2023

여우각시탈이 아닌 여우를 떠올렸습니다

쓰는 자의 일상 철학 079


1.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 낯선 사람, 어려운 사람. 사람을 어떤 기준에 두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사람은 그냥 사람일 뿐 ~한 사람 같은 구분과 경계는 없습니다. 천성적으로 사람에 대한 적대가 없습니다. 보통은 내가 만나기로 한 사람과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자고 주어진 시간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러나 한 번 만날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만나 일을 하고 친구가 되고 동료가 되고 파트너가 되어야 할 때는, 그렇게 되기까지,  내 안에 들여야 하는 사람은 조심하고 주의하고 신경을 씁니다. 상대의 호의에 감사하면서도 지속적인 의구심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다가 그 의구심이 믿음으로 바뀌는 순간, 나는 누가 뭐라 해도 그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끝까지 그 사람을 신뢰하고 먼저 등 돌리는 일은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랬습니다.


2.

오늘 내 책의 출간 가능성을 판단하려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접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실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알게 되는 사람은 일부 MSG가 첨가되었겠거니 생각합니다. 그러니 내가 보는 것의 일부만 인정하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지나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시간이 나서 그냥 한 번 가보자, 이 사람은 무슨 얘기를 할지 드러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나갔습니다. 가 오픈한 식당에서 차려놓은 음식을 부담 없이 맛보러 가자, 하는 정도였습니다. 의심도 경계도 없는, 단지 새로운 사람을 호기심반 의구심 반으로 대할 준비만 했습니다. 물론 이후 두 번째 만남은 사전답사하듯 긴장과 설렘이 있었습니다.


3.

내가 오늘 만나야 할 사람. 이 문을 열면 그가 있을 겁니다. 첫인상을 신경 쓰며 문을 열고 발을 들였습니다. 나를 반긴 이 사람은 동네 책방지기 같은 수더분함은 없었습니다. 사랑방 총무 같은 후덕함은 더욱 보이지 않았습니다. 짧게 자른 머리는 2 대 8 가르마가 아닌 그저 뒤로 빗어 올린 단정한 젊은 신입사원 정도였습니다. 안경을 눈높이에 맞추어 내려쓰지 않은 반듯한 외모가 드라마에서 보았을 법한 실장님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꼭 다문 입술이 숨을 쉬기 딱 좋을 정도로만 벌려 인사했습니다.


“아, 김선하 작가님?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힘들진 않으셨어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 이름을 언급하며 적극적인데 들뜨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맞아주었습니다. 이 시간에 나 말고 올 사람이 없었나? 왜 이리 친절하지? 선의를 의심으로 바꾸는 나의 재주가 발동했습니다. 혹시라도 긴가민가해서 얼버무리며 인사했을 법도 할 텐데, 분명 너는 김선하다. 김선하여야 한다. 확신하고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공적인 업무든, 사적인 유희든, 사람을 처음 만날 때 그 사람이 진취적인지 적극적인지 호의적인지는 처음 인사말과 말투, 강세에서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처음 볼 때 수줍고 소심하다가 친해지면 세상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지만 보통 기획 업무 능력을 가진 사람이 굳이 친해질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요구는 하지 않습니다. 환대하듯 정확하게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상대가 나를 기다리며 응대한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김대표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같은 직접적인 단어를 꺼내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을 만나서 기쁘다는 표정을 최대한 실어 대답했습니다. 김대표는 나를 보자마자 바로 테이블로 안내하며 뭘 좀 마시겠냐고 물었고, 나는 화장실로 가서 손을 좀 닦겠다고 했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며 간이 주방 상태를 곁눈질한 바. 오늘 이곳은 아이스커피만 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했습니다. 내가 테이블에 앉자, 시간을 맞춘 듯 내 앞에 종이컵을 올려두었습니다.


3.

그는 이름과 직책을 자신감에 실어 짧게 브리핑하듯 소개했습니다. 그는 이미 노트북과 메모지를 자신의 방향으로 향하도록 테이블 위에 놓고, 메모지 위에 필기구도 단정하게 놓아둔 상태였습니다. 나도 뭔가 받아 적어야 하나 싶어 수첩과 볼펜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었습니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경계가 딱히 없는 거리였습니다. 나는 그와 그의 일에 대한 사전 정보나 활동을 거의 모르는 상태로 방문했기에 질문 없이 듣기만 하는 방청석 모드였습니다.


소개가 끝나고 그는 내 이름을 종이 위에 먼저 적고는 사는 곳, 직업, 가족관계, 요즘 근황, 여기에 남편의 직업과 경제 상태까지 물었습니다. 나는 취업 준비생이 마지막 면접 관문에 임하듯 솔직하게 반듯하게 가감 없이 대답해 주었습니다. 호구조사가 끝나자, 본격적으로 어떤 책을 쓸 것인지 물었습니다.


이제야 대화의 본론에 들어섰구나 싶어 투고를 앞둔 원고 두 개를 꺼냈습니다. 내 의도를 다 듣지 않고도 그는 원고 출판 진단을 끝냈습니다. 하나는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단칼에 잘라냈고, 다른 하나는 가능성은 있는데 하며 여지를 주었습니다. 나는 우겨서라도 출판의 희망을 얻으려 했습니다. 된다 안 된다를 단번에 진단하는 그의 섣부름에 살짝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일단은 그렇지 않은 척 받아 들었습니다.


'내가 이쪽에 있어봐서 아는데~.' 같은 경험자가 무경험자를 위축시키는 말투는 아니었습니다. 내쪽에서도 반박할 근거 없이 결과에 승복하듯 고분고분 그의 조언을 들었습니다. 그는 출판 동향과 코로나 이후 출판업계의 형편을 자세히 설명하며 내 원고가 왜 안 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왜 책을 쓸 때 기획과 코칭이 필요한지 추가적인 답변을 주었습니다.


4.

“다시 생각해 봐야겠네요.”


스스로 결론을 얻으며 원고의 자신감과 자만심은 완패로 끝났습니다. 그의 다음 일정과 내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열차 시간이 기다리고 있어 안도와 아쉬움으로 꺼내둔 수첩은 별 메모 없이 가방 안으로 넣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도 일어나서 예의를 갖추고 깍듯이 인사하며 돌아서는 나를 배웅했습니다.


'지나가다 들렸어요. 차 한잔하려고.' 하는 가벼운 시간은 아니었으며 거리를 가지고 한 번은 더 오고 싶었던 적절한 대화의 시간이었습니다.


기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오는 내내 그의 말을 곱씹으며 그의 얼굴과 표정과 입꼬리와 눈매를 다시 상기시켰습니다. 되는 것을 되게 하는 사람이고, 성공률은 거의 100%였다고 자신했습니다. 그의 말은 되는 것을 되게 하고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리라, 강하게 들렸습니다. 그의 앙다문 입으로 나직하게 내뱉는 말들에 신뢰가 묻어났습니다. 그리고 창가에 여우 한 마리가 비추었습니다. 의리 있는 영악한 계집아이를 닮은 여우였습니다. 나는 왜 그에게서, 여우를 떠올렸을까요? 여우각시별도 아닌 여우를 말이지요.


(이후 이야기는 읽으려고 씁니다 63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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