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세상이 억울하다 생각된다면
경력단절 시간을 보내던 때에, 어느 목사님이 쓴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사람을 치유하는 듯한 그분의 글이 너무 좋았었다. 그때 막 상담이라는 것이 대중화되었던 때였나 보다. 그분의 블로그를 염탐하던 중 소규모 모임을 한다고 해서 바로 지원했다. 그랬더니 사전 질문이 메일로 왔다. 그 질문 중에 과거를 회상하는 질문이 있었다.
어렸을 때로 돌아가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면 어떤 장면입니까?
요즘에야 이런 질문들이 책으로도 나올 정도로 자신을 뒤돌아보는 질문들을 많이 하고 또 그 답을 쓰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책이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때는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접해서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을 뒤돌아봤다. 그랬더니 정말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딱 한 장면이 생각이 났다. 어릴 적 나는 부모님과 따로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엄마와 아빠 그리고 동생들이 있는 그곳으로 데려가 주셨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후 사고로 손가락을 많이 잃으셨다. 아마 그래서 일을 그만 두시고 어느 동네에서 작은 슈퍼마켓을 엄마와 함께 운영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내 머릿속에 한 장면은 그날 밤 잠을 자는데 슈퍼마켓 옆에 붙어있던 작은방 하나에 아빠가 대각선으로 자고 그 양옆으로 나와 둘째가 눕고, 엄마가 누웠는데 막내는 자리가 없어서 엄마 배 위에서 잠을 재웠던 그 장면이 생각난다. 막내와 내가 4살 차이가 나니 그때의 나는 대략 5살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어린 내가 생각한 건 “내가 여기 오면 안 되겠구나...”했던 생각이 정말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이 났다.
그 이후로 내가 거기를 갔는지 안 갔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장면이 내 머릿속에 또렷이 기억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 이후로 나는 할머니한테 “왜 나는 엄마 아빠랑 떨어져 살아요?”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첫 손녀라 너를 유독 예뻐하셔서 떨어져 산 거야”라는 답변을 그냥 믿기로 했다.
20살이 되자마자 경제활동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이 “엄마 나 뭐 사게 돈이 필요한데 돈 좀 주세요.”라는 말이 가장 어려운 말이었다. 말하면 안 주시는 건 아니었는데, 큰 한숨을 푹 쉬며 “얼마나 필요한데?”라고 말하는 엄마한테 돈을 말하는 것 자체가 죄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때부터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일을 했다. 또래 친구들이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놀 때 나는 그들의 호프를 날랐다. 새벽에는 에어로빅 강사일을 해서 벌었고, 주말에는 예식장 아르바이트, 저녁에는 파트타임으로 어떤 일이든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대학, 대학원을 다녔고, 일본 유학도 다녀오고 호주도 다녀왔다.
이렇게 아등바등 살면서 참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속상한 일들이 생길 때마다 울었고, 일본이나 호주에서 돈이 떨어져서 통장에 0원이 찍혔을 때도, 외국에서 말이 통하지 않아 억울하고 속상해서도 많이 울었다. 그렇게 울 때마다 나는 혼자 눈물을 닦을 줄 알게 되고, 허접한 사람들이 절대로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흘렸던 눈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나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조금이나마 완벽해지려고 노력했고, 행복해 지려고 스스로를 다그쳐나갔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씩 만들어 가면서 여기까지 왔다.
사장님 또한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셨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자기 자신을 다지셨고 결국에는 실력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나한테도 자주 말씀해 주셨다. “실력을 키워라. 실력으로 말해야 해.”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이 이야기의 본질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사장님이니까 직원한테 하는 말이야 하면서 넘겨버렸다. 그런데 나의 과거를 뒤돌아보고 나 또한 왔던 길을 되짚어보니 결국에는 내가 내 실력으로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억울하다고 울고 끝났으면 나는 그냥 울보인 것이다. 나는 내 틀을 깨고 싶어서 칼을 갈았다. 그렇게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내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어린 나이에 이런 경험을 한 나를 안타깝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철이 일찍 든다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니다. 진정한 행복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혹 상황이 나쁘더라도 절망하기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 무언가를 성취해 낼 때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유롭지 못한 환경 때문에 뭐든지 다 내가 했어야만 했고, 어렸을 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많이 짓밟혀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도록 나 자신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가면서 인생에 있어서 기회는 내가 만드는 만큼 생긴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도, 무시당했던 그 시절도 지금의 내게는 가장 좋은 영양제가 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