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미니
지금껏 ‘영다좋’ 모임을 진행하며 난 줄곧 영화를 경유해 내 삶을 끌어오거나 진단하는 글을 써왔다. 그런데 영화 <세계의 주인>을 보고 난 다음에는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어딘지 망설여졌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온전히 주인공 ‘주인’이의 이야기로만 남겨두고 싶어서였다. 주인의 그 아픔과 고통을 내 이야기로 전유하는 게 옳지 않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며칠을 고민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명백히 영화를 오독하고 있었다는 것을.
<세계의 주인>에는 좋은 장면이 너무나도 많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가장 뒤흔들었던 장면은 쪽지의 발신인이 밝혀지는 엔딩이었다. 피해자다워 보이지 않는 주인의 행동을 비난해오던 익명의 쪽지는 그가 지금껏 주인을 오해했음을, 그리고 더 늦기 전에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용기를 심어줘서 감사하다고 여러 아이들의 목소리를 빌려 말한다. 그렇게 영화는 이것이 주인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스크린 너머 관객을 향해 이제 당신의 이야기도 용기 내 들려달라고 말하고 있다.
엔딩을 곱씹으며 결국 내가 이 영화를 주인의 이야기로만 남겨두고 싶었던 건 섣부른 배려이자, 주인을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라는 틀에 가둬두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감독은 마지막 쪽지를 통해 이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임을 사뭇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인 나는 여전히 ‘피해자만의 서사’로 좁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 아픈 이야기라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내 이야기는 아니라며 선을 긋고 있던 나 자신을 돌아보며 ‘피해자’라는 단어에 매몰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시금 실감했다.
돌이켜보면 내 삶에도 성폭력이 유구하게 자리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으며 성장했고, 고등학생 때 체육교사가 나에게 했던 행동이 성폭력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기도 했으며, 급우들이 내 뒤에서 했던 말들은 당시 느꼈던 수치심을 여전히 불러일으킨다. 내게 남성 호모소셜에 대한 공포감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성폭력의 기억들로부터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개인적 피해 사실을 떠나서, 내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그 감각을 갖는 것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출발점이라는 지극히 기본적인 진실을 서른이 넘은 지금에서도 난 여전히 익히고 있는 중이다.
비단 성폭력 피해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우린 세월호, 이태원 참사 피해자를 비롯해 구의역 김군,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과 같이 일하러 갔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 변희수 하사와 같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해야만 했던 이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90년대생 또래들의 죽음과 동행해왔다. 우울과 무기력함 속에서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되뇌곤 했지만, 그럼 어떻게 해야 그들의 몫까지 사는 것인지 확실치가 않아서 늘 그게 너무 괴로웠는데 <세계의 주인>을 보고 이젠 확실히 깨달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수많은 목숨들이 돌아올 일은 없듯이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삶 또한 사건이 있기 전과 같이 돌려놓기 불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불행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고, 당신 혼자서 짊어져야 할 슬픔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공감하고 함께 슬퍼해줄 이가 되어줄 수 있다면, 주인의 세계, 더 나아가 우리의 세계는 조금이나마 덜 불행한 곳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