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앞두고 짐을 꾸리면서 그렸던 그림들을 다시 펼쳐보고 읽었던 책들을 다시 펼쳐보고 모았던 종이조각들을 다시 펼쳐본다.
그리고서는 내가 이런걸 그렸다니 내가 이런걸 읽었다니 이런건 당장에도 필요한데 잘도 덮어두고 살았구나 잘도 책장의 뒤에 넣어두었구나 이런곳은 저런곳은 잘도 다녀왔구나 그런 생각들을 한다.
가끔은 내가 해온 것들을 뒤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 느낀다. 나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건 늘 과거의 일기장 속에서 괴로움과 슬픔에 몸부림치는 나였다. 잘도 버텼구나 잘도 슬퍼하는구나 잘도 잊어버렸구나. 그럼 또 버텨지겠지 또 슬퍼하다가 다시 잊을 수 있겠지, 하면서 살아간다.
그림은 포기하려 했는데 문득 내가 그려놓은 그림들을 보려니 내가 그리지 않아서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는 형상들이, 평행우주 속 그림을 그리는 또 다른 내 인생의 모습이 급 아쉬워진다. 하지만 새하얀 벽에 걸리자마자 원치않을만큼 거창해지는 동시에 작업이 내 손을 떠나가는 과정을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그건 먹물이 물을 타고 뻗어나가는 과정보다도 더 종잡을 수 없는 길이라, 게다가 매일 부지런히 붓보다는 자음과 모음을 만지는게 더 소박해서 글쓰기를 택했다.
소박한 그림들과 책들과 종이조각들과 과거의 조각들이 모두 모여 그때의 나와 오늘의 나를 살리고 숨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