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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호 Oct 11. 2017

우리는 우리 부모에게서 욕망을 물려받는다

관찰자의 시선 - 라오스,캄보디아 (1)


“언니 원달라.

 언니 제발 원달라”     


따 프롬 사원을 나가는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소녀는 험상궂게 생긴 나보다는 옆에 걷던 언니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 언니와 나는 가이드에게 ‘아이들에게 돈을 주는 것은 그 아이의 미래를 망치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다.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조차 미안해서 서둘러 졸졸 쫓아다니는 아이들을 뿌리쳤다. 아이들은 버스 계단까지 올라와서 ‘언니 원달러’를 외쳤다. 목소리가 너무 간절해서 우리는 고개를 숙였다. 그 아이들은 ‘간절한 목소리’를 내는 데 너무 능숙해서, 그게 연기임을 알고도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백 불, 내 하루 일해서 버는 돈 보다 적은 돈이자 이곳 보통 사람들이 한 달 내내 일해야 벌수 있는 돈이다. 내게 큰 의미가 아닌 ‘원달라’가 이 곳 아이들을 망친다는 이유를 가이드는 그렇게 설명했다.      


“아이들이 나가서 구걸해서 3불, 4불 받아와요. 영업 잘하는 애들은 10불씩 받아와요. 이게 여기 어른들 일당보다 커요. 그 맛을 보게 된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아요. 아이들은 미래를 위해 무얼 배우고 공부하는 대신 오늘을 위해 구걸을 하게 되죠. 이 아이들은 커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요.”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다. 배를 곪더라도 교육은 시켜야겠다며. 애를 패서라도 학교를 보냈던 부모 손에서 컸던 우리들에게는 낯선 풍경이다. 가이드는 불편한 말들을 덧댄다.     


“여기 사람들은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해요. 못 배워서 그렇죠. 한국 사람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여기 사람들은 몇 명이 달라붙어야 할 수 있어요. 여긴 똑똑한 사람들이 없어요. 예전에 크메르 루즈* 시절에 지식인들은 죄다 죽었죠. 그러니 나라가 발전을 못해요.”     


*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 루즈는 좌익 공산단체로 내전을 통해 1975년에 정권을 잡게 된다. 이후 크메르 루즈 정권은 4년에 걸쳐 지식인과 기술자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킬링 필드>가 바로 이들의 대량학살로 알려진 곳들이다. 크메르 루즈가 집권한 4년 동안 캄보디아인 150만 이상이 죽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여기는 식당마다, 같은 규모의 한국 식당보다 두배는 훌쩍 넘는 직원들을 고용한다. 어떤 직원은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나만 쳐다본다. 나는 혼자 머릿속을 굴린다.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그런 걸까? 아니면 생산성이 낮아서 그런 걸까? 가이드는 그들의 ‘국민성’을 흠 잡으며 생산성이 낮단 이야기를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시내에서 내가 사먹는 메뉴 하나의 가격은 그들의 일당 만큼이다. 나는 다시 생각한다. 이 식당을 굴리는 사람은 내국인일까? 아니면 현지 사정에 밝은 외국인일까.     


다시 둘러본다. 여기는 모든지 느리다. 툭툭 기사들 넷 중 하나는 영업을 포기하고 잠을 자고 있다. 카페 종업원은 가게에 손님이 얼마나 차있든 상관없이 신나는 노래가 나오면 몸을 흔들고 춤을 춘다. 여기서 급한 것은 도로에 나선 기사들밖에 없다. 연신 클락션을 누르며 신호등 없는 사거리를 빠른 속도로 빠져나간다.  그것 마저도 흥으로 느껴진다.

  

모두가 느리니 나도 좀 느려도 상관없다. 여기에선 지하철 개찰구에서 교통 카드를 대다가 조금만 늦어져도 감수해야 할 뒷사람들의 눈총이 없다. 개중에 어떤 사람들은 제 관성에 못 이겨 ‘빨리 빨리’를 외치긴 하지만, 대부분의 관광객들도 이 사람들의 속도에 맞춰 느리며 넉넉하다. 서울과는 다른 속도에 맞춰 지내는 것도 하나의 ‘관광’이 된다.     


사실 빠를 필요도 없다. 우리처럼 속도를 요하는 일 자체가 거의 없다. 하루에도 수백개씩 쏟아지는 메일을 읽고, 선택에 따르는 리스크는 얼마만큼 될까 하루에도 수 없이 머리를 굴리며 판단할만한 복잡한 산업도 없고, 길게 늘어진 컨베이어 벨트를 두고도 어떻게 더 자동화를 시키며 생산성을 늘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대단위 공장도 없다.      


라오스에서 거의 12시간을 버스에서 보내는 동안 공장은 딱 하나 보았다. 그마저도 중국에서 세운 것으로 보이는 중국 글자가 잔뜩 새겨진 공장이다. 시엠립에서 프놈펜까지 6시간동안 버스를 탔을 때는 하나도 보지 못했다. 지나가다 우연히 ‘노스 페이스 공장이 캄보디아에 있다’고 듣기는 했다. 이곳에서 산업이란 관광업을 제외하면 농어업 정도뿐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서울로 향하는 공항철도 창가에 머리를 기대며 네이버를 켜서 경제 기사를 읽는다. 한국이 ‘위기’라는 기사와 어떤 기업들이 ‘순항하고 있다’는 기사가 같이 보인다. 우리는 전세계 반도체 공급량과 가격을 좌지우지 하는 제조업 강국에 살고 있으며 회사를 지원할 때 ‘어느 산업을 유의 깊게 관찰 했으며 나는 이러한 성향과 경력 때문에 어떤 업무에 적합하다’는 반 강제의 포부를 적어낸 뒤에야 회사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복잡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여행지에 마주쳤던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 내가 사는 한국은 서로를 이해하기에는 간극이 너무 커져버린, 어쩌면 아예 다른 세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신 성장을 했으며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른 삶의 속도를 견디며 살아간다. 속도가 너무 빨라져서 우리는 자주 지치며 어떤 이는 낙오한다.      


어떤 어른들은 제가 살아왔던 ‘그때’를 기준으로 어떤 젊은이들에게 자기 분수를 모른다고 호통을 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우리에게 ‘현재에 만족하며 살면 뒤쳐질 것’이라고 매일같이 경고한다. 몇십년 만에 달라진 삶의 속도와 어지간한 속도로는 욕망을 적당히 채우기조차 버거워진 이 시점에서 우리는 누구의 말을 붙잡고 살아야 할지 여전히 헷갈린다.     


우리의 부모들은 ‘원 달러’를 벌기 위해 자식들을 구걸로 보낸 부모들과는 다른 크기의 욕망을 물려주었다. 누군가는 부에 대한 욕망을, 누군가는 명예에 대한 집착을 물려주었고 또 어떤 이는 부모가 물려준 욕망을 거스르며 자신을 위한 새로운 욕망을 채우기 위해 꿈틀대었다. 우리는 서로 뒤엉켜 움직이다가 누군가는 쓰러지고 누군가는 높이 오른다.


다 채우지 못해 흘러넘치는 욕망들을 연료로 사회는 ‘발전’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발전’은 우리들이 행복하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우리가 물려받은 욕망의 크기는 너무 커서, 그것을 채우지 못한 결핍의 크기도 마찬가지로 크며 공허하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이 욕망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용감하거나 특출난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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