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오후의 에세이
우연히 닫아두었던 SNS 계정을 열었다가 첫사랑의 결혼 소식을 접했다.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에 명절 연휴기간 이틀 앞두고 최성수기. 호객으로 제주도행 티켓을 끊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몰을 보러 온 신창 풍차 해안도로. 하지만 종일 내리는 비에 구름이 하늘을 가려 허탕을 치고 인근 카페의 ‘티 블렌딩 수업’을 신청했다. 티와 아로마 소품들이 전시된 작은 공방 겸 카페, 메리 오가닉. 인적 드문 골목 아무도 없는 카페에 메리 언니와 1:1로 마주 앉아 수업은 진행되었다.
유기농으로 직접 재배하거나 수입한 70여 종의 아로마 TEA가 탁자에 놓였다. 먼저는 탁자에 있는 아로마 TEA의 성분과 효능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다음으로 따뜻한 물에 재료를 각각 우려내 변하는 색을 관찰하고, 시향하고 시음했다. 수업이 끝나고, 다환(찻물을 식히는 그릇)과 절구(차를 빻는 도구)를 내어놓으며, 메리 언니가 말했다.
“선택하는 아로마는 내 안 깊숙이 숨어있던 감정과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해요”
향기를 맡을 때, 그날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은 아로마가 있다고 한다. 향기는 바로 뇌로 전달이 되고, 뇌는 본능적으로 현재 자신의 마음과 건강에 필요한 향기를 판단한다. 그래서 직관적으로 선택한 아로마는 현재 감정을 표현하고, 선택한 감정을 만들기도 한다.
오늘 나는 말린 오렌지 껍질의 베이스로 먼저 청귤. 레몬을 선택했다. 향긋한 향기로 스트레스를 완화시켜주는 효능을 가진 재료들이다. 차의 맛이 변질되지 않게 하려면, 스테인리스 가위, 칼 등은 가능한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깨끗하게 소독한 손으로 동그랗게 말린 청귤은 삼각형으로 조각조각 내고, 오렌지와 레몬 껍질은 손으로 뚝뚝 부러뜨려 접시에 담는다. 그리고 여기에 상큼한 향을 강조하기 위해 세로로 쭉쭉 찢은 조릿대와 레몬그라스 2스푼.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펜델, 코리안더 씨, 클로버는 한 스푼씩 절구에 빻아 담고, 시나몬은 잘게 쪼개어 담았다.
노랑 빛깔 물이 드는
오렌지, 레몬, 코리안더 씨, 클로버, 시나몬.
연두빛깔 물이 드는
청귤, 조릿대, 펜델, 레몬그라스.
겨울에 마실 차라 조금 더 따뜻한 색감을 표현하기 위해 고민을 하다 붉은빛을 내는 ‘히비스커스’ 두 스푼을 넣고, 말린 장미는 송이채로 절구에 넣고 으깬다. 그렇게 다듬어진 모든 재료를 아래가 움푹 파인 다환에 넣고 섞어 완성된 나만의 블렌딩티. 투명한 주전자에 우려내니 예쁜 핑크빛 물이 들었다.
코를 톡톡 두드리는 기분 좋은 오렌지 냄새. 가슴이 따뜻해지는 익숙한 맛에 6년 동안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사람. 기억에서 지워버린 줄만 알았던 그 사람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시 떠올리니 아주 지저분한 사람이었는데. 그땐,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한 참 마음을 다잡고 도서관에 앉아있으면, 내 코앞에 앉아 ‘킁킁’ 성가신 소리를 내며 코를 풀어대질 않나. 물 콧물이 얼굴을 휘감는지도 모르고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던 사람이었다.
첫인상부터 콧물이 아주 인상적이긴 했다.
그 사람은 매일 같은 점퍼를 입고 다녔다. 둘째 누나가 사줬다는 그 점퍼를 졸업하는 그 해 겨울이 다 갈 때까지 다 낡도록 입고 또 입고 거의 매일 입고 다녔다. 그 낡은 점퍼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오렌지가 한가득 들어있는 검은 비닐봉지를 손목에 걸고 도서관으로 오가던 뒷모습. 그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의 가장 일상적인 모습.
그러다 도서관에서 마주친 날엔 실컷 책상에 앉아 코 다 풀고 나온 손으로 꼭지가 툭 튀어나온 젤 못생기고 큰 오렌지를 비닐봉지에서 하나씩 꺼내 주고는 했다. 오렌지에 대한 답례로 DavidTea 블렌딩 오렌지 차를 티백 용지에 담아 조금 덜어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콜록콜록거릴 때까지 고집스럽게 끊여 마시지 않고, 책상에 고대로 티백을 모셔두고 방향제로 썼다.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Godiva초콜릿을 주면, 그 자리에서 하나 꺼내먹고 아껴먹다가 굳게 만들고, 라벤더 비누를 주면 손난로처럼 꼭 쥐고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런데 오렌지가 떨어지면, 총알같이 1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 과일을 한 아름사고, 과일코너 옆에 진열된 화분을 한 참 구경하다가 자장면을 먹으러 갔다. 여러모로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닌 사람이었다.
그리고 식사 후엔 언제나 입가심으로 나른한 낮에는 학교매점에서 셀프 원두커피를, 밤에는 팀 홀튼 캐모마일 티를 한 잔씩 마셨다. 그러다 곤란하거나 자신이 잘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면, 마시던 일회용 컵 테두리를 잘근잘근 이빨로 깨물며 내 눈치를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 틈이 생기면 얼른 화제를 돌려 탄자니아 교수님 댁에 방문했을 때와 야외실습에서 만난 야생동물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사람의 주 장난감은 상어이빨과 앵그리버드.
친구와 소풍을 좋아했다.
책을 많이 좋아하진 않았다. 하지만, 서머셋 몸과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꽃과 식물과 살아 숨 쉬는 새와 동물을 사랑했다. 그래서 Environment Engineering을 공부하러 캐나다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에 다시 돌아와 그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땐, 모든 것이 변했다.
그 사람은 화려한 생활에 한껏 부풀어 중국 거부가 되고 싶은 장황한 꿈만 읊었다. 순식간에 내가 정말 좋아했던 사람은 볼품없고 보기 싫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뒤돌아서 다시는 그 사람을 보지도 기억하지도 않았다.
모든 걸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모든 걸 너무 많이 기억하기 때문에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때, 내가 정말 좋아했던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었던 ‘아름다움’이었는지 모른다. 또한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실수였다. 사람을 통해 아름다움을 보려 했던 것.
사람은 스스로 아름다워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타인의 따뜻한 시선에 의해서 새롭게 발견될 수 있을 뿐. 오늘 블렌딩 한 나만의 ‘오렌지 아로마 티’처럼. 선택한 감정과 선택한 기억으로 언제든 새롭게 블렌딩 될 수 있다. 이제야 진짜 에필로그를 맺었으니, 이젠 유유히 그 모든 시간을 떠나보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