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말리는 헬린이

헬린이 흑역사 모음

by quietrebel

"Now the story of a wannabe lifter who lost all ego and dignity, and the one pair of pink dumbbells who had no choice but to keep his workout together."


"It’s Arrested Gym-Development."




1. 커피 테러범이 되...

세트를 쉬는 중 커피 한 모금 마시려는데, 손에 땀 차 있는 것을 깜빡하고 말았다. 손바닥과 컴홀더가 미끄러지면서 남아있던 커피가 바닥에 와르르륵-! 헬스장 바닥이 순식간에 아메리카노 색으로 물들고야 말았다.

주변 사람들 쳐다보는 시선이 하나 둘 느껴지는데, 나는 이미 본능적으로 목에 걸친 수건을 조심스레 당겨 바닥으로 보내는 순발력을 발휘한다. 아무도 안 봤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을 담아. 최선을 다해, 광나게 닦아낸다. 나의 땀수건은 커피에 절여져 그날 운동 내내 못쓰게 되었지만.


2. 케이블 그립이랑 기싸움하다 패배 = 억지 루틴변경

* 목표: 암풀 다운으로 등 풀기

케이블 머신에 내가 원하는 바가 안 걸려있네...? 갈아 끼우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모른다. PT쌤이 친절하게 갈아주셨으니까... 그래도 해보겠다고 손도 잘 안 닿는데 케이블을 당겨와 고리를 바꿔보려 애를 써본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줘도 저 쇠고리가 절대 안 빠진다. 손이 다 벌게져서 몇 분째 서 있는데 옆에서 헬짱 형님이 "안 빠져요?" 하는 눈빛으로 쳐다만 보시고 절대 도와주지는 않는다...

그 순간 바로 “아~ 원래 이 그립으로 운동하려고 했지~ 기구 점검 좀 해본 거야~”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오늘의 루틴을 자연스럽게, 아니 억지로 바꿔본다.


3. 원판아 미안해… 내 발톱도 미안해…

[속보] 원판 참사… 발톱 1개 전사

하체 성장을 꿈꾸던 헬린이의 야심 찬 계획이 원판 낙하 사고로 중단됐다.

목격자(피해자 동일)에 따르면, 피해자는 레그 프레스를 위해 20kg 원판을 교체하던 중이었다. 그 순간 원판이 피해자의 손을 탈출, 왼쪽 발톱 끝을 정확히 저격했다. 피해자는 "원판이 떨어지는 찰나 시간이 느리게 흘렀고, '최소 사망'이라는 직감이 들었다"며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전했다.

사고 직후 식은땀을 흘리며 귀가를 고민하던 피해자는 결국 당일 운동 루틴을 완전히 망쳤다. 다행히 신체적 통증은 하룻밤에 불과했으나, 운동을 망쳤다는 심리적 타격이 커 사고 순간을 무한히 복기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4. 베르사그립 핏: 10만 원짜리 꿔다 놓은 장비

데드리프트 할 때 손이 아픈 게 싫어서, 굳은살 박히는 게 싫어서 큰 마음먹고 장비를 구입했다. 가격은 좀 비쌌지만 내 눈에는 베르사그립만이 내가 착용할 수 있을만했다. 다른 건 못생기고 볼품없어 사고 싶지 않았다.

양쪽벨크로를 맞닿게 붙인 후 로고가 선명히 보이도록 그것을 들고 헬스장을 활보하면 역시 운동깨나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그러나 등 운동을 하면 할수록, 데드리프트를 하면 할수록 베르사 그립을 사용량은 반비례 곡선을 그리며 낮아졌다. 이거 어떻게 쓰는 건데????? 이게 맞아?????? 기본적인 무게, 망가진 자세, 베르사 그립의 조합은 부끄러움 그 자체였다. 아무도 묻지 않겠지만 누가 물으면 말해줘야지. 이건 그냥 치킨 먹을 때 쓰는 비닐장갑 같은 거예요! 나의 불쌍하고 사치스러운 베르사 그립.


5. 핵스쿼트 탈출기

마지막 세트가 끝나고 당당하게 일어나려는데, 아 안전핀이 잠기지 않는다. 아니, 발판 자체가 올라오질 않는다. 기구에 내가 박제라도 된 걸까? 쇳덩이와 내가 한 몸이 되어 영원히 헬스장의 일부가 될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기구가 고장이 났든 내 지능이 고장이 났든, 나는 살기 위해 혼자 끙끙대며 이리저리 레버를 눌러보았다. 하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육중한 무게 때문에 땀은 줄줄 흐르고, 의식과 육신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갔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무너지면 내일 아침 헬스장 오픈 직원에게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나를 깨웠다. 나는 마지막 남은 생존 본능을 끌어모아, 부들거리는 발끝으로 깨금발을 서서라도 그 무게를 밀어 올렸다. 종아리가 터져나가도 상관없었다. 오직 생존, 그 하나만을 위해 있는 힘껏 손잡이를 당겼다.

'철-컹!'

드디어... 해방이었다. 쇠사슬을 끊고 나온 노예처럼, 혹은 홍해를 가르고 탈출한 모세처럼 나는 기구 밖으로 기어 나왔다. 무서운 기구는 사용법 정도 제대로 숙지하고 운동하자.


6. 벤치프레스 쟁탈전 패배

내가 먼저 점령한 벤치, 나 vs 헬짱.

나는 그날도 여지없이 에어팟 착용 중이었다. 단절을 위해. 굳이 벤치를 쓰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벤치는 언제나 내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내게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벤치 바꿔드릴게요” 권유가 아닌 통보의 음성이 소리 없이 들렸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헬짱님의 근육이 나를 옥죄어왔다. 나는 못 들은 척하며 “네네 쓰셔도 됩니다. “ 마치 사극의 이방처럼 읊조리는 대답을 건넸다.

비굴하진 않았다. 그냥 양보라고 해두자. 그냥 오늘은 벤치가 좀 필요 없었다고.. 그렇게 나를 두둔했다.



[결론]

적지 않은 세월, 나는 매일 같이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를, 아니 아메리칸 퍼니스트 짐 비디오를 찍었다.

그러나 부끄러움에 몸서리 칠 시간 대신 철판을 얼굴에 깔고 멍이 채 빠지지 않은 발가락을 내일도 반스 플랫폼에 욱여넣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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