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와 다리가 내려준 기적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s://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521
12월을 맞이한 우리는 기대한다. 은은한 황금빛 조명이 휘감겨진 오색찬란한 크리스마스트리와 난로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땔감, 기름지고 따뜻한 음식들이 한상 가득 차려진 화려한 식탁과 경쾌하고도 싱그럽게 울려 퍼지는 캐롤, 이 모든 것들에 둘러싸인 화기애애한 식구들과 그들의 입가에서 떠날 줄 모르는 미소를, 즉 ‘크리스마스의 정서’를 꿈꾼다. 하지만 이 황홀한 꿈이 모두에게 허락된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12월의 이데아로 나아갈 수 있는 반면, 또 다른 누군가는 발이 묶여 씁쓸하고 적막한 현실에 주저앉는다. 오랜만에 신작을 내놓은 알렉산더 페인은 바로 이 성탄절이라는 이상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현실에 '남겨진 사람들'(<바튼 아카데미>의 원제)을 포착한다.
1961년 네브래스카 오마하 태생의 알렉산더 페인은 미국의 영화감독이다. 그리스계 미국인인 페인은 비슷한 세대, 유사한 이민자적 정체성을 가진 ‘제임스 그레이’, ‘대런 아로노프스키’처럼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을 폭로하는 영화를 줄곧 연출해왔다. 외에도 주인공들의 계획과 이상이 현실에서 늘 틀어진다는 점에서 '불확실성의 원리'를 영화에 적용하는 ‘코엔 형제’, 이후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결과를 이어낸다는 점에서 ‘빔 벤더스’와 유사성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언급한 시네아스트들에 비해서 페인의 작품은 코믹하고 경쾌하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페인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늘 꿈꾼다. 복권 당첨, 휴가, 은퇴, 선거, 심지어 현실에 도래하지 않은 '다운사이징' 기술 등을 낙관적으로 기대한다. 이 계산은 늘 자기중심적이어서 나한테만 정확하고, 자신 바깥의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페인의 작품은 늘 주인공이 예측한 '궤도'에서 이탈하여 파국으로 치닫거나, 때론 그 변화를 온당 긍정함에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페인의 작품에선 '웃음'이 가득하다. 원하는 것을 실현할 때 발생하는 안도의 웃음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평범한 것을 뒤틀고 위반하는 데서 촉발되는 부조화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과연 그 웃음은 연휴에 따스한 안식처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공허하고 차가운 사립학교에 남겨진 사람들에게도 허락될까?
남겨진 사람들에게 허용되지 않은 것은 '이동'이다. 만약 그들에게 원활한 이동권이 보장되었다면 결코 남겨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거부당하고 배태된다 한들, 어떻게든 발과 다리로 뒤쫓아 갈 수 있는 권한이자 힘이 바로 이동권이기 때문이다. 그 힘을 도입부터 확인할 수 있다. 본 작품의 시대상은 1970년인 만큼, 그 당시에 통용되었던 35mm 필름으로 촬영되었으며, 필름에 뒤따르는 노이즈나 그레인이 영화의 도입부에 잔뜩 껴있다. 35mm 필름의 매체성은 쨍하고 선명한 디지털이 보편화된 오늘날에 색다른 미감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필름이 만연하던 당시의 관점으론 평범할 수 있고, 또 보편적인 미감으로 따진다면 온전히 아름답다고 말하긴 어렵다. 아름다움이 질서정연함과 매끄러움, 완전함에 상응하기에 자꾸 스크린에 튀어나오는 그레인은 마치 귀찮은 날벌레마냥 감상자의 주의를 껄끄럽게 분산시키고, 또 아름다운 피사체에 거친 구멍을 내기에, 우리가 선호하지 않는 까끌거림이나 혼탁함에 상응한다.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에서도 지지직거리는 낡은 매체의 노이즈가 껴있다. 즉 도입부는 당시의 정서를 재현함과 동시에 그리 아름답지 않은 형식이다.
이 현장에서 페인은 '편집'을 이용하여 이동한다. 그는 오프닝 타이틀이 끝나갈 무렵 '페이드인'을 사용하여 영화의 중심적인 쇼트로 뛰어 들어간다. 어둠과 혼탁함이 가득하던 현장에서 선명한 차원으로 이동한 이후에 그레인과 노이즈는 급격하게 줄어든다. 이어진 밝은 쇼트엔 성탄절을 앞두고 연습에 매진하는 성가대가 담긴다. 그 성가대의 화음엔 약소한 문제가 있다. 다행히도 재빨리 지휘자가 부조화를 바로잡아 화음은 아름다워지고 이후 '연결', 곧 이동하는 숏엔 신성한 빛을 계시하여 캄캄한 밤을 몰아낸 '베들레헴'의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이 담겨있다. 즉 페이드인과 편집이라는 이동은 추함을 몰아내고 아름다움으로 나아가며, 그렇다면 남겨진 사람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심미성’일지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늘 아름다운 순간을 꿈꾸고 있다. 고대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 폴(폴 지아마티)은 유적지 여행을, 메리(데이바인 조이 랜돌프)는 요절한 아들과의 추억을, 털리(도미닉 세사)는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기를, 또 아버지(스티븐 손)와 재회하는 순간을 고대한다. 여기서 심미성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드러난다. 현실에서 희소하거나 불가능한 것을 간절히 바라거나 실현할 때 따라오는 감각이 바로 아름다움으로, 그것은 인간을 경이롭고도 감미롭게 도취한다.
그러나 모두에게 이동과 심미성이 허락되진 않는다. 영화의 배경, 바튼 아카데미는 자손에게 권력과 부를 세습하고자 하는 부르주아지들이 선택하는 명문 사립학교다. 그래서 학생 대부분은 백인이요, 유색인종 학생은 성가대의 흑인 소년, 인도계 학생, 한국인 유학생 예준(짐 캐플란) 정도로 그친다. 또한 1970년 당시 부르주아 및 쁘띠 부르주아일 수 없었던 흑인들은 청소부, 관리인, 조리사 등 백인들을 부양하는 프롤레타리아로 대부분 존재한다. 이들과 달리 이동이 허락된 인종은 백인이다. 성가대 시퀀스 이후,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바튼 아카데미의 입구가 촬영된 '롱숏'이 이어진다. 그 속을 거닐고 있는 백인 학생들은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누군가는 신나게, 또 다른 누군가는 안온하게 길을 걸으며 카메라가 포착하는 혹독한 설경 너머로 멀어진다. 이후에도 재차 사용되는 롱숏은 넓게 포착하는 의미보다는, 카메라와 피사체의 ‘머나먼 거리’를 부각한다. 롱숏에 담긴 피사체들은 늘 카메라로부터 저 멀리, 혹독한 프레임의 바깥으로 사라져가며 카메라 워킹 없이도 이동하고, 이로써 카메라가 포착하는 '구체적인 현실' 너머로 떠날 수 있을 테다. 앞선 도입부를 생각해봤을 때, 이들은 춥고 서늘한 프레임을 떠나 따스하고 정겨운 차원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학생들의 걸음을 방해하지 않게끔 길에 수북하게 쌓인 눈을 치우는 청소부 대니(나힘 가르시아)는 '클로즈업'되며 붙잡히고, 삽에 한가득 모인 눈을 버리기 위해서만 움직일 수 있다. 그에게 허용된 운동은 오직 빗자루 질뿐이다. 조리실에 발이 묶인 메리 또한 창문을 바라보지만 절대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없다. 메리의 아들 커티스는 한때 유일했던 흑인 ‘바튼맨’이었지만 학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대학으로의 이동이 좌절되었고, 강제로 끌려간 전장에서 전사하고야 말았다.
이후 폴의 연구실을 포착한 시퀀스에서, 페인은 사무실을 구성하는 사물들을 흡사 정물화처럼 촬영한다. 사물이 담긴 ‘필로우 숏’엔 대니를 포착할 때 사용되던 일말의 떨림마저 제거된다. 그 이유는 사물은 자의로 움직여선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목적과 편의를 위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여기서 이동의 권력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백인의 이동을 위해서 유색인종이, 인간의 유용함을 위해 사물이 멈춰 있어야 하는 것처럼, 약자의 이동권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교사, 학부모 등의 ‘기득권’은 피지배자를 고정시키며 제가 다닐 통로를 원활하고도 쾌적하게 개통한다. 가령 털리의 친모(질리언 빅맨)는 새로운 남자(테이트 도너번)와 재혼하였고, 그와의 안락한 신혼여행을 위해 방해꾼이 될 수 있는 아들의 성탄 연휴를 금지한다. 연휴 내내 털리는 따분한 학교에 발이 묶일 뻔 했다. 이때 전후가 찰나 동안 겹쳐지는 형식 페이드인이 재차 사용되는데, 과거에서 현재로 온전히 이동하지 못하고, 현재에 중첩되는 과거를 가시화한다. 소년에게 기숙학교라는 과거의 숏이 현재, 미래로 스며들며 새로운 시공으로의 이동이 제한되는 것이다. 이후 폴과 학교를 떠난 사실이 탄로 나자 친모와 양부는 아들의 이동권을 더 확실하게 박탈할 수 있는 '사관학교'에 보내려 한다. 아들을 잃은 메리는 기운이 없고 침울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버릇없고 오만한 학생 쿤츠(브래디 헤프너)는 그녀가 더 맛있는 급식을 제공해야 한다며, 슬퍼도 일은 똑바로 해야 한다고 불평한다. 메리는 제 감정을 따를 수 없고 백인의 요구대로 붙잡혀있어야 한다. 학생의 눈에선 기득권이자 권위자처럼 보이는 폴 또한 사정은 다르지 않다. 하버드를 중퇴한 그는 선생으로서 내릴 수 있는 선택이 아주 협소하다. 그래서 자신을 받아준 바튼 아카데미한테 늘 ‘을’일 수밖에 없고, ‘갑’인 학교가 요구한 교칙을 엄격하게 따르며, 법에서 한 치도 엇나가지 않은 채로 고정된다.
이동을 극소수만 허락받는 이유, 영화에서 모두 다 움직이려하면 길이 꽉 막혀서 필히 ‘교통 체증’이나 ‘추돌 사고’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모두는 자신들의 이상향에서 멀어진다. 2주 간의 성탄 연휴에 들뜬 학생들은 모두 다 짐을 싸기 바쁘다. 즉 요리조리 이동하려 하고 있는데, 그런 와중에 남학생들의 이상을 실현해주는 도구들이 사라진다. 그래서 이동하려던 남학생들은 갑자기 발을 떼지 못한다. 모두가 어지럽게 이동하며 서로가 잘 가꿔둔 이상향을 짓밟게 되는 것이다. 다이너에서 '핀볼'을 두고 털리와 다른 남자 손님들이 충돌한 현장 역시 마찬가지의 사례다. 내가 기대하거나 계획한 시공간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이에 반하는 가치관을 가진 타인을 어떻게든 주저 앉혀야 한다.
이동이 보장된 부모들은 남겨진 학생들의 발과 시선이 닿을 수 없는 외국을 유랑한다. 헬리콥터를 타고 스키장으로 떠난 네 명의 학생 역시 비루한 기숙학교 너머의 휘황한 풍경과 마주했을 것이다. 페인은 남겨진 학생들의 부모가 머무는 미국 바깥, 네 명의 학생들이 마주했을 스키장 풍경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이들이 나아간 프레임 외부를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두며, 그만큼 이동은 열려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임을 역설한다. 페인이 선택한 35mm 필름의 매체성도 마찬가지다. 디지털에 비해 아스라하고 흐린 35mm 필름은 그만큼 현재-현실에서 멀어져 다른 시공간을 유영할 수 있다. 그래서 역으로 부동은 절망적인 제한이다. 우리가 휴일이나 명절을 바라는 이유는 반복되는 일과에서 탈출하여 무제한적인 시공간을 누리고, 이로써 더 다양하고 새로운 것을 접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이에 반해 남겨진 이들에게 가능한 것은 정규 학기의 반복이자, 기껏 가능한 욕망이라 한들 이미 지니고 있던 포르노 잡지, TV 프로의 '재방송'에 그친다. 한때 짜릿한 감각이었다고 한들, 되풀이되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감각은 힘이기 때문에 똑같은 세기를 반복해서 자극받으면 '굳은살'이 박여 둔감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유한한 자신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는 폐쇄적인 사람 역시 마찬가지의 권태를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때론 스스로를 거두고 타인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페인은 영화 중반까지 '불통'을 부각한다. 폴은 깐깐하다. 성적을 너그럽게 매기지 않는다. 그래서 학생들은 불만이 많다. ‘코넬대’에 가지 못할까봐, 이로써 계획에 차질을 빚을까봐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교칙을 까다롭게 지키는 폴 역시 학교와 제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 그만큼 엄격한 것이다. 이들 모두는 제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 상대에게 토로하기 바쁜 '화자'로 등장한다. 동시에 이익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그들은 상대 의견을 수용하는 '청자'로 절대 변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예배하는 시퀀스가 대표적으로, 신부는 바삐 떠들어대지만 이후 클로즈업되는 그 누구도 예배에 집중하지 않는다. 너 때문에 손해를 봤다며 털리와 쿤츠는 서로 따지기 바쁘고, 폴은 동료 교사와 신경전을 벌인다. 털리가 아버지와 재회한 순간도 마찬가지다. 털리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다움을 기대하지만, 정작 그는 아들의 발화에 집중하지 않으며 정신분열증에서 비롯된 의심만 늘여놓는다. 즉 이동권이 보장된다고 한들, 스스로의 표상에 갇혀서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들 역시 부동을 자처하는 셈이다.
물론 이동권이 보장된다 한들, 모든 이동이 가능하진 않다. 영화에서 흥미로운 설정은 폴이 '고대 문명' 교사라는 점이다. 그는 바튼 아카데미와의 이해관계와 더불어, 역사 교사이기 때문에 더 깐깐할 수밖에 없다. 명명백백히 검증이 완료된 과거는 사실이라는 항구에 무거운 닻을 단단히 정박하기 때문이다. 복수 답안이 가능한 현재, 이로써 무궁무진하게 펼쳐질 미래와 다르다. 또 그 과거에서 비롯된 일부 필연적인 현재 역시 거스를 수 없다. 폴의 하버드 중퇴라는 과거가 현재의 이동 일부를 제한한다. 털리가 아버지와 만난 이후 부각되는 '선조성'도 마찬가지로, 아들 역시 아버지처럼 항우울제를 챙겨 먹으며 유전 내지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환경에서 비롯된 정신질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즉 우린 필연성이란 이유로 이동이 제한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동이 항상 아름다움을 연결하지도 않는다. 이동은 ‘변화’인데,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 욕심이 끝도 없는 인간은 이동으로 인한 변화를 대체로 긍정적으로 고대한다. 폴이 성탄절 파티에서 리디아(캐리 프레스턴)와의 데이트를 긍정적으로 그려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페인의 작품답게 실제로 펼쳐진 현장은 개인의 상상과 늘 딴판이다. 실상 리디아는 폴 앞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제 연인과 달콤한 입맞춤을 갖는다. 연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디제잉을 하며 기분을 전환하려 한 메리가 울컥한 마음에 눈물을 쏟고 마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폴처럼 이동이 두려운 인간은 특정 공간으로의 진입을 제한하고 실망을 미연에 방지한다. 연휴 동안 바튼 아카데미 체육관으로의 이동이 금지되어 있다. 그 이유는 기어코 헬스장에 뛰어 들어간 털리의 탈골된 어깨, 끔찍이도 고통스러워하는 소년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 끌려간 군인은 왼손이 절단되거나 전사하고, 들뜬 마음으로 스키장에 간 쿤츠가 뒤집어진 얼굴로 나타나니, 항구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이동을 제한하는 규칙을 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규칙은 유지이자 보수이지, 결코 더하지 못한다. 우리가 새로운 시공을 개척하기 위해선, 상실을 감내하고서라도 용감하게 이동해야 한다. 털리는 곤히 잠든 폴의 '열쇠 꾸러미'를 가로챈다. 이후 선생 및 학교 관계자만 진입 가능한 여러 공간을 누비고 다닌다. 이때 털리는 먹고 마신다. 즉 규칙을 위반하고 이동하며 자신의 몸 안에 무언가를 ‘채운다.’ 외에도 편법을 써서 ‘현장학습’으로 보스턴에 가고, 식당의 법을 위반하여 어떻게든 '체리 쥬빌레'를 만들어먹으며, 실내에서 '폭죽'을 터트리는 등 새로운 기억을 여럿 더한다. 더함과 더불어 존재의 새로운 역할을 발견한다. 보스턴에 동행한 메리는 자매 페기(주아니타 펄)와 오랜만에 상봉하는데, 그 만남은 메리의 입가에 부재하던 미소를 되찾아주고, 주인 잃은 아기용품과 커티스라는 이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페인은 이를 형식으로 가시화한다. 영화 초반 급식실에서 수평으로 이동하는 ‘트래킹 숏’은 식사를 하는 학생, 교직원의 얼굴을 광활하게 담아낸다. 즉 이동에 의해 하나의 숏은 무수한 형태를 가질 수 있게 되는데, 이에 반해 고정된 카메라로 클로즈업한 폴의 얼굴은 다양한 가능성과 단절·고립된다. 비로소 폴이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카메라가 트래블링 숏으로 변했을 때, 리디아가 가져다준 크리스마스 쿠키라는 선물과 만난다.
또한 영화 내내 등장인물들은 귀를 닫았었기에 타인에게 이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입을 닫고 귀를 열 때, 그렇게 나의 주체적인 이동과 더불어 상대의 이동 역시 존중할 때, 모두에게 이동권이 평등하게 보장된다. 다이너의 핀볼 소동은 모두 다 각자의 규칙만 고집하며 상대의 말을 듣지 않았기에 발생했다. 불통으로 인한 대치가 양측의 이동을 제한했고, 이후 힘이 센 성인 남자들이 털리를 압도하여 소년의 이동을 ‘도망’으로 제한했다. 다행히 폴과 리디아가 중재하여 소통하자 이후 원활하게 걷는 모습이 이어진다. 폴이 털리의 사정을 귀담아 듣고 함께 정신병원에 방문하는 시퀀스도 그렇다. 여기서 기득권이 약자의 이동권을 제한하지 않을 때 만인의 이동이 여유로워지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털리가 대니의 청소, 폴이 메리의 감자 깎기를 나눠서 짊어지니 흑인의 이동권이 보장되었고, 리디아와 메리가 털리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고 폴이 의견을 청취하여 보스턴 현장학습을 허락한다.
결말에서 폴은 교사로서 마지막 권위를 이용하여 털리의 이동권을 보장하고, 자신 역시 인생 2막으로 나아간다. 학교를 떠나는 폴에게 털리와 메리가 찾아와 그의 앞날을 지지한다. 즉 페인은 인생이 귀와 다리에 달려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신작에서도 주인공들이 기대한 '탄탄대로'는 늘 불발한다. 그것이 예측하기 어려운 이동의 필연이다. 동시에 이동은 예기치 못한 기쁨을 안겨다줄 수 있다. 계획에 없던 헬기의 도착, 파티 및 볼링장으로 이동한 털리가 즉흥 데이트를 즐기는 것처럼, 절망이 확실시된 순간에도 이동은 희망을 계시한다. 메리가 이혼할 것이라 예측한 TV쇼 커플이 되레 우승한 것처럼 말이다. 즉 우리는 털리가 폴에게 가르쳐주는 ‘볼링’처럼 경쾌하고도 유연하게 미끄러질 수 있어야 한다. 분명 그 이동은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나, 항구성보다 더 짜릿하고 신선한 선물을 보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