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나름 미리 계산하고 나왔다

by 조직을 읽는 여자

회의실 공기가 묘하게 무거웠다.


본부장은 말을 멈춘 채 물을 한 모금 마셨고,
우리는 동시에 노트북 화면을 내려다봤다.


아무도 키보드를 두드리지 않았다.


침묵은 늘 본부장이 먼저 깼다.


“이 자료, 누가 만든 거죠?”


박서연 책임연구원이 고개를 들었다.


“도윤 씨가 초안 잡았고, 제가 정리했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어제 밤에 다시 한 번 수정했습니다.”


본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요. 근데 방향이 좀 다른 것 같아요.”


방향.


나는 이미 열 번째 방향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면 어떤 방향을 원하시는 건가요?”
서연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본부장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음… 지난번 말씀드린 것처럼, 조금 더 전략적으로.”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럼 큰 틀만 다시 잡아서 보고드리겠습니다.”


회의는 끝났고, 우리는 복도로 나왔다.
서연이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도윤 씨, 데이터 오후까지 가능해요?”
나는 대답했다.
“가능하죠.”


사실 가능하지 않았다.


내 자리에 돌아오니 최민수 선임연구원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회의 어땠어요?”
그가 물었다.


“방향이 또 바뀌었어.”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게 전부였다.
민수의 ‘아’에는
놀람도, 분노도, 기대도 없었다.


그는 늘 정확히 6시 1분에 퇴근했고,
늘 무난한 평가를 받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렇게 살면 편하긴 하겠다.


그리고 곧바로 부정했다.
나는 저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서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본부장과 나란히 섰고,
나는 그 뒤에 섰다.


본부장이 말했다.
“서연 씨, 다음 주 일정 한번 정리해서 주세요.”
“네, 정리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서연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도윤 씨, 아까 자료 오늘 안으로 부탁드려요.”
“네.”
엘리베이터 거울 속 내 얼굴이 조금 낯설었다.


그날 밤, 집에 와서 노트북을 켰다.
자료를 고치다가
무심코 검색창에 이렇게 썼다.


‘공공기관 퇴사 후 삶’


나는 내가 꽤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선택 앞에서는
최소한 계산은 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연봉도, 직무도, 회사 분위기도 따져봤다.
이건 도피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이번만큼은 제대로 고른 거라고 생각했다.


며칠 뒤, 나는 퇴사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몰랐다.

퇴사했더니,
사장이 있을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