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교육> 멘탈 알러지 유발물질과 망한 면역체계
환절기에 눈이 간지럽고 눈물이 많이 나는 편인데 안과에 가보니 “재채기랑 콧물도 많이 나시죠?”라고 맞혀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눈 건강에 문제가 있는게 아니라 어떤 알러지 증상이 눈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경우라는 것이다.
시간이 생긴 김에 알러지 전문병원에 들러 종합 알러지 검사를 받았다.
아주 간지럽고 상담까지 30분 이상 걸리니 여유가 있는 날 받는걸 권한다.
검사는 이렇다. 양팔에 일부러 주사바늘로 30군데 가량을 줄지어 찔러 미세한 구멍을 낸다.
각 구멍에 ‘토마토 알러지를 발현시키는 약품’, ‘견과류 알러지를 발현시키는 약품’ 등을 한방울씩 도포한다.
대조군으로 한 구멍에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마지막 구멍에는 간지럽고 부어오르는 반응을 일으키는 약품을 떨어뜨린다.
이제 15분 이상 팔을 앞으로 뻗고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
나는 세상에 알러지를 유발할 수 있는 물질이 그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개 알러지와 고양이 알러지를 유발하는 균이 다른 것도 처음알았다.
즉, 어떤 사람이 개/고양이 알러지 중 하나만 갖고 있고 다른 동물에는 괜찮을 수 있다는 얘기다.
언뜻 보아도 두군데의 상처가 엄청나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그 약품에 상처가 반응한다는건 알러지가 있다는 거고 부어오르는 정도와 가려움의 정도가
알러지 정도를 알려준다.
의사는 내게 ‘집먼지’와 ‘집진드기’ 알러지가 굉장히 심한 편이라고 했다.
15분을 견디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팔이 간지러웠기 때문에 바로 믿음이 갔다.
그런데 왜 그런 알러지가 생긴것일까. 의사의 설명은 뜻밖이었다.
아동은 어릴때부터 다양한 병균이나 기생충, 알러지 발현 요인에 적절히 노출되는 것도 중요한데
그 과정에서 면역체계가 이들을 막아낼 보호 체계를 갖추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어릴 때 집을 상당히 깨끗하게 관리하셨나봐요”
의사는 농담반으로 이렇게 말했다. 즉, 유전적 요인이나 다른 요인도 있겠지만 면역 체계를 갖춰가던 무렵의 내가
오히려 너무나 청결한 환경에서 집먼지를 가까이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 심한 알러지 환자가 됐다는 얘기다.
이는 알러지의 대표격인 땅콩 알러지에 대한 실험에서도 밝혀졌다.
땅콩 알러지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측되는 두 그룹의 아이들을 두고
A그룹은 태어나서부터 특정기간동안 땅콩 혹은 땅콩이 첨가된 음식물을 일절 섭취하지 못하게 했고
B그룹의 부모에게는 일부러 자식에게 일주일에 한번 땅콩을, 그리고 첨가물도 간간히 먹이게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땅콩을 멀리한 그룹의 17%가 땅콩 알러지 반응을 나타냈고, 땅콩을 먹게 한 그룹의 3%만이 알러지 반응을 보유하게 됐다.
‘안전’이 목적이라면
알러지 예방에 필사적인 우리의 노력이 오히려 과보호의 부작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조너선 하이트는 최근 저작 <나쁜 교육>에서 밀레니얼 세대 직후 세대, 1995년께 태어난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기 시작한 2003년부터
뭔가 다른 움직임이 감지된다고 지적한다.
책에서는 ‘i(internet)’세대, 세간에서는 ‘z세대’로 불리는 이들의 특징은
감정적 과보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어린시절부터 날카로운 것, 알러지 유발 가능 식품은 물론 각종 차별을 연상케하는 모든 언어습관 등에서
철저하게 격리된 채 자라났다.
이들에게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줄여서 피씨함(PC)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가치이며
부모와 교사들은 이들의 ‘안전’을 위해 의도보다 영향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상대가 어떤 의도로 아시안계 미국학생에게 “Where are you from?”이라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내 외모가 전형적인 미국 백인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이 곳 출신이 아닐 것이라고 넘겨짚는 것은 인종차별이고 폭력이고 나아가서 나의 정체성을 짓밟는 것이기에
당장 나는 반발해야 하고 상대의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는 태도는 미국의 많은 대학들을 과잉 조심의 덫에 빠뜨리고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조너선 하이트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나 마이크로 어그레션(micro aggression)이라는 새로운 개념들이
발화를 듣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쉽게 결정되고 진짜 공격이거나 장애를 초래하는 위협인지에 대해 질문하는 것초가 공격으로 간주하는 문화가
잘못됐다고 강조한다.
이는 실제로 사람들 간의 소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대학생들이 장차 사회에서 만날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하기 전
소통 면역을 길러야 하는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말이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는 자신을 ‘he’, ‘she’로 지칭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학생들을 배려하기 위해
성별 지칭 대명사를 철저히 규제하고 있다.
이런 바람은 최근 한국의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도 퍼지고 있다.
최근 한 퀴어프렌들리 식당의 SNS에 계산을 잊고 나간 손님 일행을 찾는 글이 올라왔다.
주인은 늦게라도 연락을 달라며 그들이 앉았던 장소와 인상착의 등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주인은 동행자들을 ‘여성’이라거나 ‘남성’이라고 지칭했다.
일부 누리꾼들이 여기에 반박했다.
퀴어프렌들리한 곳에서 손님 본인이 자신을 여성이라고 혹은 남성이라고 정체화하는지 확인도 안됐는데
섣불리 성별을 표기하는건 실례이자 모욕적이라는 거다.
그때 내 안의 어떤 종이 울렸다.
지금 이 주인은 그 손님들의 성적 자기 정체성을 지우거나 오도할 목적이 없었다. 그럴 이유도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코로나 시국의 자영업자로 한 테이블의 정산이 되지 않아 당황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로 사과했다.
그 분을 특정 성별로 패싱(passing)해서 죄송하다고.
이런 것이 퀴어 진영이 하고 싶은 일인가?
이런 때 의도를 살펴야 하는게 아닐까.
온라인 상의 가해자 몰아가기는 일단 가해자로 지목된 이의 언행을 최대한 악랄하게 재구성하고
모욕주는데 혈안이 돼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는게 뭘까.
재난 상황에서 “sir, which pronoun shall I call you?(여성이신지 남성이신지 혹은 둘다 아니신지 어떻게 불러드려야 옳을지요?)가
최초의 질문이 되어야 하는가?
한국의 대학도 이 과보호 무면역 방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디지털 성폭력 소굴이었던 ‘소라넷’ 폐쇄를 이끈 공로로 BBC선정 올해의 인물 100인에 오르기도 했던 하예나 DSO 대표가 지난해
포항공대 총여학생회의 초청을 받고 강연을 하려다 남학생들의 극렬한 반발로 강연 자체가 직전에 취소된 일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주로 진보-보수 균열로 이런 강의 보이콧 사태가 발생하지만
최근의 한국에서는 페미니즘-반페미니즘이 강의 보이콧 사태의 중심점으로 보인다.
포항공대 학생들이 표면적으로 내놓은 강의 보이콧 논지는 이거였다.
여남학생 공히 등록금을 내는데, 총여학생회가 주도해서 강의료를 지불한다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하 대표는 ‘그게 문제라면 무료로 강의하겠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사이버불링, 총여학생회를 향한 협박은 그치지 않았다.
조너선 하이트 식으로 보자면
포항공대 학생들 중 하예나 대표의 강의가 싫은 사람은 강의에 안 가면 된다.
혹은 미국의 일부대학이 ‘안전 장소’라고 부르는 곳을 만들고 거기에서 점토만들기, 컬러링북 색칠하기, 심리삼당 등으로
교내에 하예나 대표의 강의가 열리기 때문에 받는 심리적 충격을 완화하는 방법도 있다.
혹은 같은 시각에 자신들만의 세미나를 열어도 된다. 공개적으로 토론을 제안할 수도 있다.
교내에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여성이 무료로 강의를 하러 들어오면
무너지는 에고를 가지고 있다면 치료를 받으면 된다.
그런데 이른바 ‘요즘 대학생’들은 ‘요즘 대학’의 부둥부둥을 받으면서
‘저 사람/저 말/저 사상’이 나에게 심리적 알러지 반응을 일으킨다며 드러눕는 행동에 취해 있다.
이들에게 논리는 필요 없다.
이러이러해서 싫은게 아니라
내가 상처 받기 때문에/저사람이 나를 상처주기 때문에/나를 슬프고 우울하고 침울하게 만들고/나를 없는사람처럼 만들기 때문에
상대는 적이 되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조너선 하이트는 강조한다. 학생들이 나쁜게 아니라고, 그들을 과보호하는 부모, 교사, 학교가 변해야 한다고.
결국 우린 함께 소통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걸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