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런 애쓰모글루 <좁은 회랑>을 읽고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 일컬어진다. 현재의 이라크 근처에서 번성했던 세계 최초의 도시 우르크의 왕이 길가메시다.
4200여년 전 점토판에 쓰여진 글에 의하면 그는 상업도시를 번창하게 하고 주민들에게 공공서비스 등의 인프라를 제공하는 등 파격적인 정치 천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는 법. 길가메시는 자신의 권력을 이기적 욕망에 사용하고 시민을 탄압했다. 남성들을 노예로 부리고 여성들을 탈취했다.
길가메시 왕국 모든 처녀의 처녀막은 길가메시의 것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을 정도다.
이를 ‘길가메시의 문제’라고 부른다.
이에 시민들이 신전에 몰려가 한탄하자 신 아루루는 길가메시를 복사, 붙여넣기한 새 영웅을 만들라고 조언한다.
길가메시와 같은 풍채, 같은 힘을 가진 엔키두가 생겨나자 그는 길가메시와 대립한다.
길가메시가 폭정을 할 때 싸움을 걸어 엎치락 뒤치락 한판이 펼쳐진다.
문제는 엔키두의 심성 역시 길가메시와 똑같이 난폭하고 이기적이었다는 것이다.
둘은 금세 친해져서 공모해 사고를 치기 시작한다.
이제 우르크의 고민거리는 두배 혹은 그 이상이 되었다.
신의 해법은 요즘식으로 해석하면 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의 삼권분립이 대표적인 예로, 입법 사법 행정부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권한을 갖고 한 기관이 독재하는 모양새가 되지 않도록 감시한다.
한국에서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즉 공수처 같이 고위 권력을 견제할 기관이 필요하다는 주문과 비관론이 팽배했고
결국 많은 이들에게 또다시 정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
공수처가 고발의 대상이 되면서 ‘결국 그놈이 그놈이다’류의 여론이 재생산되고 엘리트들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정치경제적 이득 면에서는 하나로 뭉치는 이익집단이라는 점이 드러난 셈이다. 옥상옥에 그칠것이라는 우려는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길가메시 신화와 현대판 도플갱어 신화가 합쳐져서
길가메시가 자신과 판박이인 엔키두를 마주치자마자 죽어버리는 운명이었다면 어땠을까.
길가메시 도시국가의 시민들은 신탁을 받으러 신전으로 갔지만
4000여년이 흐른 지금은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정부는 여전히 신전과 같은 존재를 붙잡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이 그것이다.
국민청원제도는 문재인 정권 들어 생긴 악습이다.
언뜻 보기에는 북을 두드려 직접 왕을 대면하는 신문고를 떠올리게 하지만
실상은 20만명을 모아오지 않으면 없는 문제로 취급할 것임을 자인하는 시스템이다.
20만명이라는 자의적인 숫자는 어떤 기준이며, 20만명이 동의한다면 어처구니없는 청원이라도 다 논의할 가치가 있는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문제다.
지금도 청원 게시판에는 어떤 연예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사형시켜달라는 수준의 청원이 올라온다.
국가에 건의할 것이 있으면 개인 SNS에 청원 주소를 퍼나르고 기다리는 것이 가장 손쉽게 떠오르는 방안이 돼 버렸다.
정치는 케이블 방송사의 아이돌 육성 프로그램 투표가 아닌데 말이다.
길가메시 시절과 변하지 않은건 하나 더 있다.
여성의 자유가 국가 혹은 독재자 개인의 소유로 치부됐다는 것.
2016년 행정자치부는 대한민국의 243개 지방자치단체 가임기 여성인구수, 평균 출산연령, 합계출산율 등의 10년간 추이를 그래프로 정리해
‘대한민국 출산지도’라는 엽기적인 서비스를 선보였다.
여성들은 국가를 위한 임신기계, 인구 조달의 수단이 아니라는 강한 반발에 부딪혀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이후에도 한 남성공무원이 미혼인 여성 공무원의 정보를 취합해 유포하는 등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여성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보는 눈이 높아지기 때문에 드라마 등에서 일부러 여주인공보다 뒤떨어지는 남주인공을 섭외해
여성들의 눈을 낮추자는 ‘무해한 음모(실제로 문건에서 사용한 표현)’를 진행하자는 정부 내부 문건도 있었다.
한 지자체에서는 출산을 앞둔 여성들을 위한 지침서로 집을 비울동안 남편이 먹을 반찬을 해놓으라는 주문을 실어 대중을 아연하게 하기도 했다.
최근 서울시의 합계출생율은 0.58로 최저치를 또한번 경신했다.
성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3대 욕구가 아니고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출산하려는 욕구는 떨어지면 떨어졌지 올라가지 않을 기세다.
정부는 코로나 초기, 출생율 상승을 조심스레 점쳤지만
웬걸, 집안에서 복닥대던 가족은 이혼율 급상승으로 응답했다.
최근 한 알러지 비염 관련 자료에서 알러지가 늘어나는 이유 중 하나로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늘어나면서 청소가 미비’한 점을 꼽은 것을 보고도 놀랐다.
서울의 한 지자체에서는 밥을 못차려먹는 남성들의 고독사를 방지하기 위해 밀키트를 지급한다고 한다.
죽은 남성 노인의 집에서 쌀 몇포대가 나왔다는 우스운 얘기도 들린다.
평강공주와 온달의 격차는 이 정도로 벌어졌다.
제손으로 밥도 해먹을줄 모르는 남자는 오히려 무해할까
엔번방의 주도자 조주빈은 42년이라는 가벼운 형을 받고도 ‘나는 한명도 강간한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
이혼 절차를 밟던 부인을 장인이 함께 있는 집에서 남편이 일본도로 찔러죽인 사건이 아직 몇 개월 지나지 않았다.
여성은 이제 남성의 울타리를 믿지 않는다.
어떤 번지르르한 정책이나 정치인도 돌아선 여성들의 마음을 잡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여성의 몸은 길가메시의 것도, 대한민국 정부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