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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자A Nov 19. 2021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지 마

아동혐오, 노인혐오로 돌아올 밖에

한 브랜드 아파트 입주민 회장이 아파트 주민이 아닌 초등학생들이 자신의 아파트 내부 놀이터를 이용한 것에 불만을 품고 어린이들의 휴대전화를 빼앗고 보호자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로 '도둑' 등의 폭력적 언사를 한 사건이 화제다.


아파트 내부 놀이터는 입주민들의 사유공간이 맞다. 그렇다고 해서 입주민 대표의 폭력적인 행동을 용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일부 입주민들은 대표의 해임을 건의했다.


또다른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 사람과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올해 입주한 새 아파트 놀이터가 다른 동네 아이들 때문에 붐비는게 싫다"고 말해서 놀랐다. 그것도 인기있는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본인의 자녀가 '5분에서 10분' 가량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두 번 놀랐다.


다른 지역 아이들이 몰려와서 스크럼을 짜고 기물을 파손하거나 하루종일 놀이터를 점거하는게 아니라

최대한의 쾌적을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어서다.


내가 유지보수비를 내기 때문에 나만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은 경제적 자유의 관점에서 옳지만, 그 적용에 차별적으로 강경한 수단을 사용한다는 게 문제다.

우리 아파트에 거주하지 않아도 친척 어린이라면 자신의 자녀와 함께 놀이터에서 노는 것을 용인할테다.

내 자녀의 제일 친한 친구라면 함께 놀겸 먼데보다는 가까운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놀거나 내 자녀가 그쪽 아파트 단지에 가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느껴진다.

그렇다면 누구까지의 문제가 남는다.


놀이터의 성격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다.

혹자는 공공 놀이터나 공원, 놀이시설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놀이터는 일부 유료 시설을 제외하면 공공재의 성격을 수행한다.

주거의 대부분이 아파트 형태인 한국에서 아파트 놀이터는 입주민과 그 친구들 외에도 주변에 거주하는 어린이들에게 가장 접근성 좋고 안전한 놀이공간이다.

놀이터가 아예 없어서 예전처럼 공터나 공사장, 산 같은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곳으로 비 입주민만을 몰아내는 것은

장기적이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합리적이지 않다.


내 아파트의 놀이터는 나만의 것, 이라는 생각을 주입받은 어린이가 자라면 어떤 어른이 될까.

내 부모가 사준 물건을 남이 만지는것은 용인할 수 없다, 내가 투자한 사교육비로 내가 진학한 학교의 네임밸류는 내것이다.

더 나아가서 나보다 덜한 투자를 해서 아웃풋이 떨어지는 사람은 나와 클래스가 다르고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을 공짜로 함께 누릴 수 없다, 심하게는 그런 사람을 무시해도 된다. 나보다 아래라는 것을 대놓고 표현하는 사람이 된다면

오히려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된다.


이 이야기는 노키즈존을 비롯해 사회에 만연한 아동혐오와도 관련이 있다.

아파트를 드나드는 비 입주민 어린이를 향한 잣대와 아파트 내부를 산책하고 벤치 등을 이용하는 어른에 대한 반응은 분명 다르다.

약자에 대한 배제는 쉽게 이루어진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글로벌 스탠다드 따라가기에 급급한 한국이 아동의 권익에 관해서만은 쇄국을 고집한다.

일본에서는 대중교통에서 아이가 울면 기사가 “아이가 우네, 그래 아이는 우는 게 일이지”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모든 성인은 한때는 어이었다. 약자인 시절에 사회와 뭇 시민들의 배려와 보호를 받지 못한 어린이가 20살이 넘는다고 갑자기 예의바르고 배려넘치는 어른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노키즈존, 비입주민 놀이터 방문 금지에 상처입은 아이들이 자라나서 윗세대 노인들을 어떻게 대할까


책상에 금을 그어놓고 넘어오면 짝꿍을 때리는 수준에서는 벗어나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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