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도 크레딧도 얻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K 장녀’라는 신조어가 트위터를 중심으로 퍼진지 2년여. 기성 매체는 역시 느리다.
중장년 남성 위주 언론사의 한계일 것이다.
이제라도 ‘K 장녀’에 대한 논의가 한 일간지에서 시작된 것은 반길 일이나
그 속에 절절이 녹아있는 여성/당사자 배제가 아쉬울 따름이다.
2021년 8월 11일 수요일자 한국일보 칼럼에 ‘K 장녀’를 다루는 글이 실렸다.
k-pop처럼 한국을 뜻하는 k로 시작하는 단어들이 자조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K-장녀도 마찬가지다. 한국 장녀들에게 요구되는 의무는 시대만 바뀌었을 뿐 변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과거에는 학업을 포기하고 돈을 벌어 동생(주로 남동생)의 학비를 책임졌던 누나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소리를 공공연하게 듣는다.
장녀 역시 보호받아야 하는 자식이라는 자각보다
여차하면, 집이 기울면 마치 갖다 팔기라도 할 것처럼. 어차피 결혼하면 시가의 귀신이 될 운명인데다
그 중에서도 맏딸은 동생들을 엄마의 보조 역할로 돌봐야하고 집안일의 의무까지 떠맡는다.
성감별 낙태를 뚫고 세상에 나오는데 성공했더라도, 태어나면서부터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경험은 한국의 여성이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k 장녀라는 말이 폭발적 공감을 얻은 것은 그 폭력의 방식이 교묘하고 미시적으로 우리 삶에 스며들어
마치 배려하고, 챙기고, 솔선수범하고, 양보하고, 물러나는 것이 나의 성격인 것처럼 스스로마저 속이게 되었다는 걸 깨달은 충격 탓이다.
한국일보 칼럼은 딸을 두었다는 중년 남성이 썼다.
그는 이제서야 이 말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며 k 장녀라는 말의 출처를 인터넷에서 긁어모아 게시했다.
그러면서 ‘출처생략’이라는 말과 함께 아무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다음은 칼럼에서 인용된 트위터 글이다.
“장녀 건들지 마. 눈빛이 차분하다고 얌전한 게 아니라 차분하게 돌아 있는 것뿐이야. 건들지마, 경고했어. 크레이지 아시안 걸 중에서 제일 크레이지는 장녀야. 기억해”
“현관 옆방은 K장녀 방이다. 집 안에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가 가장 먼저 들리는 이 방은 가족의 중재자이자 가족 대소사에 과도한 책임을 느끼는 K장녀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관 옆방에 사는 나는 아빠에겐 큰아들이자 해결사이자 기대주로, 엄마에겐 대타이자 친구로, 남동생에게는 누나이자 형, 미니엄마였다.”
트위터에서 'K장녀'라는 조어를 만들어낸 장본인은 한국일보 칼럼 필진으로부터 아무 연락도 받은적이 없고 글을 게재하라는 허락도 한 적이 없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작자 미상의 예술작품은 모두 여성의 작품이라는 말이 있다.
여성의 이름은 역사 속에서 그만큼 쉽게 지워지기 때문이다.
전 언론중재위원인 칼럼 글쓴이 마저도 온라인 필부들의 크레딧을 적극적으로 찾고 챙기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이들의 활동은 21세기든 22세기에든 지워질 수 밖에 없다.
여성들의 문제제기는 아우성, 뭉뚱그려진 분노의 형태로만 남을 뿐
진정한 문제해결을 위한 시발점이 되지 못한다.
한국일보 기자 중에 혹은 한국일보가 연락해 기고를 받을 사람 중에 여성 필진이 없었을까?
그냥 그러고 싶지 않은거다.
그런 데 시간을 쓰고 싶지 않은거고
결국 k 장녀는 하나의 밈이자 하나의 글 주제거리, 하루 칼럼 마감을 막을 글감으로 쓰이고 다시 잊혀지는 단어라는 반증이다.
내 주변에 살아 숨쉬는 숱한 k 장녀들은 지금도 감정노동에 시달린다.
여성이라서 받는 굳은 차별들. 채용 면접장에서, 승진 기회가 밀리면서, 내 일을 내 크레딧을 챙기려고 하면 이기적인 여자라고 욕을 먹으면서
하다못해 미용실에서 내가 원하는대로 머리카락이라도 자르려고 하면 “여자가 남자 머리를 하면 어떡해요” 소리를 들어가면서
거기에 더해 집에서는 죽을때까지 장녀로. 밖에서도 누구씨는 역시 장녀라서 다르다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오늘도 젓가락을 놓고 앞접시를 나른다.
칼럼 글쓴이는 본인의 딸에게 ‘한국 장녀처럼 살지 말라’는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누군가의 맏딸은 오늘도 지면을 얻지 못하는 한낱 대상에 머무른다.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