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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땡이 러너 Feb 07. 2017

2017년, 태극기 수난시대

아군과 적군을 나누는 '진영 판독기'가 됐다.

대선이 코앞이라는데, 정치 기사는 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정치부 발령 반년이 채 되지 않은 신참 정치부 기자가 공부하며 쓰는 정치 용어 사전. 아는 만큼 쓸 수 있고, 아는 만큼 보인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포스팅.



태극기는 전통적으로 평화와 조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낸다


행정자치부 홈페이지에 게재된 태극기의 의미이다. 태극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구한말인 1882년(고종 19년) 무렵이다. 1883년 왕명으로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공포했고,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기 통일 양식'을 제정하면서 지금의 형태를 갖췄다. 이후 반백년이 넘는 시간 평화와 조화, 통합의 상징으로 나부꼈다. 


태극기가 수난시대를 맞고 있다. 조화와 평화라는 뜻은 간데없고 진영을 나누는 '인식표'가 됐다. 지난해 11월 촛불집회 초기에만 해도 참가자들은 태극기와 촛불을 한 손에 들었다. 하지만 태극기를 든 보수·친박단체 집회가 스스로 '태극기 집회'라고 칭하기 시작하면서 시민들은 태극기냐, 촛불이냐를 선택해야 했다. 통합의 의미는 간데없다. 2002년 시청광장에서 온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던 것이 태극기라면, 2017년 시청광장에서 국민을 두 패로 가르는 것이 태극기이다. 

서울시청광장에 설치된 조모씨의 분향소. 유족의 반대에도 강제로 설치된 분향소라 영정을 구할 수 없어 태극기를 영정 삼았다. /사진=뉴스1

태극기는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도 된다. 보수집회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목소리를 내면 태극기 봉이 머리 위로 날아든다. 욕설은 덤이다. 지난 설 연휴, 한 박사모 회원은 '탄핵반대'가 적힌 태극기를 양 손에 나눠 들고 투신했다. 보수단체는 유족의 반대에도 시청광장에 분향소를 차렸다. 영정이 오를 자리에는 태극기가 올랐다. 이렇게 독점당한 국기는 아군과 적군을 나누는 '진영 판독기'가 됐다. 


보수단체 집회 후 길바닥에 버려진 태극기 /사진=오마이뉴스

정당도 태극기 독점에 가세했다. 새누리당은 지난 5일 당 로고를 태극기를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했다. 흰 바탕에 '보수'가 명시된 당명을 빨간 글씨로 적고, 당 상징 무늬를 파란색으로 새겨 넣는다는 방안이다. 야당의 비난이 쏟아진 것은 물론이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국민통합의 상징인 태극기를 국민 분열에 악용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며 "지금처럼 태극기가 곤욕을 치른 적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당이 "새누리당이 심벌에 태극기 형상을 넣는 것은 흉측한 범죄를 저지른 조폭이 팔뚝에 태극기를 문신하는 것과 똑같은 짓"이라며 "새누리당은 보수와 태극기를 더 이상 독점하고 능멸해서는 안 된다"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렇다고 태극기가 애지중지 다뤄지는 것도 아니다. 집회가 끝난 뒤 바닥에는 플라스틱 재질의 태극기가 쓰레기통 근처에도 못 가고 바닥을 나뒹군다. "국기는 사용 시 그 존엄성이 유지돼야 하며, 각종 행사나 집회 등에서 수기(手旗)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행사 후 국기가 함부로 버려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현행 국기법 10조가 무색한 지경이다.


주장의 옳고 그름은 제쳐두더라도 한 집단에서 입맛에 맞게 독점하다 보니, 이제 태극기만 봐도 거부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나온다. "태극기 흔드는 월드컵 응원도 이제 보수집회로 봐야하냐"는 농담도 웃어 넘기기엔 너무나 현실적이다. 그래서 간간이 들려오는 "국기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무겁게 다가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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