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문제를 풀 때 지문을 모두 읽으려는 바보가 가끔 있어"
창밖에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학원 로비에 앉아 혁준의 말을 들으며 나는 마음 속으로 뜨끔했지만, 듣고만 있었다.
"영어는 그렇게 푸는 게 아니야. 영문이 기본적으로 두괄식인 걸 모르고 하는 짓이지"
혁준은 영어라는 언어는 결론부터 말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는 영어의 어순과도 영향이 깊은데, 문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동사가 한국어에 비해 빠르게 나온다. 한국어는 목적어 다음에야 동사가 나오지만, 영어는 주어 다음에 바로 동사가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론을 먼저 말하는 것에 익숙한 영어 문화권 사람들은 글을 쓸 때도 두괄식(글의 첫 부분에 주제문이 등장하는 글의 형식)으로 쓴다. 혁준의 말대로라면 대부분의 영문은 첫 문장만 읽어도 글의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모든 상황에서 한 가지 방법만 고집하는 걸 또라이라 그래. 그런 사람이 커서도 꼰대가 되기 쉽지"
"아 그거 어찌보면 편법 아니야?"
"편법? 편법이 어딨어. 빠르고 정확하면 그게 정석인거지"
혁준은 그러면서 자신을 믿고 그 방법을 써볼 것을 권하다가, 이제야 깨달아서 약간 놀랐다는듯이 말한다.
"이거 모르는 사람이 있었구나. 너 정도가 모르면 아마 대부분이 다 모를 것 같네. 왜 나만 영어 모의고사를 풀면 시간이 남는지 이제야 알았다. 다들 끝날 때까지 정신없이 풀던데"
혁준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약간 웃더니 이야기한다.
"세상 일 다 그래. 굳이 독창적이고 특출날 필요 없어. 남들이 왠지 모르게 잘 안 하는 걸 해야 돼. 틈새시장이라고 하지. 심지어 모방이라 해도 상관없어"
혁준은 소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 놓고 나를 보며 자신있게 이야기한다.
"그렇다 해도 편법이나 모방은 좀 그렇지 않아?"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야, 명석"
혁준의 새된 웃음소리가 귀를 찌른다. 혁준은 그 자리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담배나 한 대 피워야겠다면서 로비를 빠져나간다. 나는 갑자기 텅 빈 로비를 바라보며 정적을 마주한다. 아주 깊은 정적이 나를 누르는 것 같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그리고 걸어서 혁준이 나간 문 앞에 선다. 고요하게 빗소리를 내며 익숙한 풍경이 있는 문밖을 바라본다. 혁준은 아마 우산도 없이 흡연구역으로 간 거 같다. 나는 습관적으로 입으로 요즘 되뇌이고 있는 단어를 떠올린다. deodorant(데오도란트) 데오도란트는 몸에 뿌리는 탈취제이다. de라는 접두사와 ant라는 접미사가 어근 odor에 붙은 파생어이다. odor는 '냄새'라는 뜻이다. 냄새, 문득 내가 무슨 냄새를 맡고 있는지 생각한다. 초봄의 비는 고요하고 쓸쓸하게 가로수, 현수막, 입간판, 신호등, 우산 위로 내린다. 그리고 나는 비의 습기 가득하고 눅진한 냄새를 맡고 있다. 나는 비를 내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나의 잡념도 씻겨져 내려가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뜬금 없게도 이 순간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는 사진을 찍고 싶지는 않고, 긴 글을 쓰기도 뭐해서, 짧게 메모를 남기려고 한다.
3월 21일, 학원의 로비 안에서 문밖을 바라봄. 봄비가 내림. 이제 오후 수업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러 가야하는데…
그런데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은 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이 느낌을 메모로써 온전히 기록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지금 이 순간의 사소한 감정들을 어떻게 설명할까. 지금도 스쳐갔다 사라지는 생각들은 어떻게 붙잡을까. 코끝이 약간 마비되는듯한 진하게 풍기는 비 냄새는 또 어떻고.
"냄새?"
나는 방금 떠올린 아주 좋은 생각을 붙잡아 두지 못한 것을 잠시 후회했다. 그리곤 다시 과거의 기억을 되감기하여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뒤져보았다.
"냄새를 기록할 수 있으면 어떨까?"
지금까지 빛을 통해 눈으로 반사되는 시각적 정보를 기록하는 것도 가능했고, 청각도 마찬가지로 가능했다. 촉각, 미각은 둘째치고, 냄새는 과학이 발달하면 언젠가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그냥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나의 아끼는 수첩을 꺼내어 적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