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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의 하루 Feb 01. 2024

2004년의 하루

  나는 문방구 앞에 서있다. 아빠가 등굣길에 항상 쥐어주는 파란색 천원짜리 지폐가 바지 주머니에 잘 있는지 확인한다. 구겨지지 않게 가로 세로로 두번 접어서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밖에서 안이 보이는 유리문을 손잡이를 잡고 들어간다. 아주머니가 커다란 프린터기 앞에서 인쇄 작업을 하고 있다가 나를 보고 어서 오라고 인사한다. 온갖 물건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는 천장이 낮은 공간 안에서 무엇을 고를지 가만히 생각해본다. 출입문 가까이에 있는 난로로부터 후끈한 온기가 끼쳐온다. 나는 약간의 고민 끝에 딱지 두 개와 불량식품으로 불리는 간식 한 개를 찾아 집었다. 사실 요즘들어 매일 같이 문방구에서 사는 것들이다. 아주머니는 내가 들고 있는 것들을 곁눈으로 슬쩍 보더니 가격이 1200원이라고 말한다. 나는 준비해두었던 지폐와 동전을 아주머니에게 건넨다. 또 오라는 아주머니의 짧은 인사와 함께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리문을 열고 차갑고 입김이 나는 바깥으로 몸을 향한다.



  추운 겨울 날씨와 방금 샀던 딱지를 접어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바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학원을 두 군데 가야하기 때문이다. 태권도 체육관과 바이올린을 배우는 음악학원에 가야 한다. 히터가 있긴 하지만 잘 틀어놓지 않는 태권도 체육관 안의 차가운 공기를 생각할 때면 약간의 소름이 끼친다. 그리고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만, 가면 오늘은 무엇을 하게 될지 궁금하기는 하다. 체육관을 원을 그리며 달리기도 하고, 미트라고 불리는 길쭉한 쿠션같은 물건을 발로 차기도 하며, 품새나 태권무라는 춤동작같은 것들도 연습하는 등 다양하다. 어쨌거나 3시 반에 가게 된다면 형과 함께 태권도 학원에 갈 수 있어서 좋다. 그러려면 일단 음악학원부터 가서 1시간을 보내고 태권도 학원에 가야한다.



  음악학원은 작은 3층짜리 독채 건물의 2층과 3층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2층은 원장선생님이 한 방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다른 방에서는 피아노선생님이 피아노를 가르친다. 3층에서는 다른 피아노선생님이 있어서 피아노와 함께 수행평가를 위한 리코더, 단소 등을 가르치는 대략적인 구조였다. 2층의 문을 열면 들려오는 빠르고 현란한 피아노 소리가 나에게 뛰어들듯 반긴다. 단조롭게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음계 연습을 하는 아이들도 많이 있었다. 원장실에 들어가면 원장선생님의 바이올린 특훈이 진행되고 있다. 열정적인 목소리로 활을 더 올리거나 내려라고 한다거나, 박자를 더 끌거나 끊으라고 하거나 줄이 안맞으니 튜닝을 하라는 등이다. 나는 잠시 앉아서 어떤 누나가 레슨을 받는 것을 지켜보며 몸을 녹인다. 얼른 준비하라는 원장님의 말에 악기통을 열고, 턱받이를 악기에 달고, 활을 꺼내고, 활에 송진가루를 리드미컬하게 묻히는 등의 만반의 준비를 한다. 연습실에 들어가 최근까지 배웠던 연습곡들을 숫자를 세가며 반복적으로 연습한다. 가끔씩 원장님이 내가 연습하는 걸 보고 뭐라고 하셨는데, 하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열심히 큰 소리를 내가며 연습한다. 연주회때 할지도 모른다고 복사해줬던 합주곡 악보도 열심히 연주한다. 그리고 원장님에게 특훈을 받아가며 열심히 바이올린 연주에 집중한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딱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학원비때문에 부담이 된다는 말도 몇 번 하신 걸 들었지만, 나는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시간을 즐긴다. 아무 고민도 생각도 없어지는 것 같아서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음악학원이 끝나고 태권도 학원에서 열심히 운동을 한 뒤에 형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보니 엄마와 동생이 이미 도착해있었다. 나는 남는 시간을 숙제를 하고, 게임을 하고, 책을 읽고, 누워서 쉬며 한가롭게 보낸다. 당장의 고민거리들과 걱정거리들을 머릿속으로 불러내고 비워내기를 반복하면서. 이 선생님이 했던 말, 저 친구들과 했던 대화들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내일을 위한 준비와 휴식을 한다. 그러면서 언제 나는 어른이 될까. 월드컵을 세 번정도 더 보면 어른이 될텐데. 중학생이 되면 학교가 늦게 끝나고 고등학생 되면 야자라는 게 있다던데. 어른이 되는 건 얼마나 바쁘고 힘든 일일까. 당장의 고민에서 하나가 더 추가된 것 같은 느낌에 얼른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 그리고 컴퓨터 전원버튼을 켜고, 내가 한창 푹 빠져있는 게임을 할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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