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의 아버지 영신은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듣고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자신의 아들이 등산로에서 굴러 떨어져서 의식을 잃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잘 믿기지 않기도 했다. 백석병원 응급실에서 응급 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면회를 오시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영신은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영호가 지금 많이 다쳤습니까? 영신은 걱정으로 격양된 목소리였다.
"17시경에 청록산 등산로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 응급실에서 호송되어 치료중입니다. 갈비뼈와 왼쪽 다리에 골절상이 있고, 그 이외에 심한 외상의 흔적은 없어요. 그런데 머리쪽으로 어디를 부딪혔는지 두개골 손상이 좀 있어서 뇌쪽에 정밀 검사를 진행해봐야 돼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영신은 또다시 마음이 무너지는 듯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라고 말한 뒤에 영신은 자신의 아내를 불러 다시 자초지종을 전했다. 영신의 아내 역시 정신이 아찔하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어제까지만 해도 영호는 집에 다녀와서 아무렇지 않게 저녁을 먹었고, 자신은 영호를 위해 과일을 깎아서 영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영호가 응급실에 누워있다니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듯 했다. 영신은 서둘러 아내를 데리고 흰색 SUV 차량에 올랐다. 영신의 아내는 조수석에 타자마자 눈을 감고 손을 모으기 시작했다. 기도를 하는 것 같았다. 영신은 불길한 마음에 탄식 섞인 한숨을 쉬면서 주차장에서 차를 몰아 백석병원 응급실로 향한다.
오전 시간에 태석은 B카페 앞에 서있다. 야외의 테이블에는 모두 사람들이 앉아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커피 한 잔을 놓고 담소를 나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커플도 있었다. 카페의 간판은 따로 없고, 영업을 하고 있다는 표시로 'OPEN'이라고 쓰여진 작은 입간판이 밖에 세워져 있다. 밝고 따뜻한 조명이 창밖에서도 보인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간 태석은 빠르게 자리를 훑어본다. 몇 안되는 테이블에 모두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쉽게도 카페를 나오려고 하는데, 매장 진열대에서 판매하고 있는 원두가 눈에 띈다.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이거는 새로 나온 원두에요?"
사장이라고 불린 젊은 남성은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한 뒤에 판매하고 있는 에티오피아산 원두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한다. 산미는 조금 있고, 바디감이 커서 약간 무거운 느낌에, 자스민과 과일향이 나는 원두라고 말했다. 태석은 관심이 생겨서 구매를 할지 안할지 고민한다. 그리고는, 원두가 들어있는 비닐백에 나있는 작은 구멍에 코를 가져다 댄다. 그리고 비닐백을 손으로 누르고 떼면서 향을 맡아봤다. 고소한 원두향이 퍼졌다. 태석은 꽤 괜찮다고 생각하고 원두를 갈아달라고 말하고 지갑을 꺼내려고 하는데, 태석의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건다.
"안녕하세요"
인사한 사람은 서영이었다. 서영은 반가움을 감출 수 없다는 듯이 웃고는 태석에게 말했다.
"커피 사러 오셨나봐요. 저도 책 좀 읽으려고 반차까지 내서 왔는데 자리가 없네요"
태석도 반갑게 인사하고는, 원두를 사던 일을 마저 한다. 태석은 서영이 옆에서 두리번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서영은 손을 어딘가로 뻗으면서 말했다.
"저기 자리 났다. 혹시 커피 사드릴까요? 자리가 있었으면 커피 한 잔 하려고 오신 거 맞으시죠?"
태석은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고마운 나머지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다고 말한다. 둘은 계산대 앞에 나란히 서서 주문을 했다. 태석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서영은 토피넛 라떼에 샷을 한 번 추가해서 주문한다.
둘은 빈 자리에 앉았다. 창가라 옆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고, 느긋하게 앉아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푹신한 쿠션의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둘은 제일 먼저 통성명을 했다.
서영이 가방에서 꺼낸 책은 하루키의 신작이었다.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책을 읽고 있다고 서영은 말했다. 무슨 내용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읽히기는 아주 잘 읽힌다고 말한다. 화가와 그림에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 것 같아서, 그쪽 분야에도 관심이 자연스레 생기게 된다고 했다.
"저는 하루키를 예전부터 쭉 좋아했는데, 하루키가 좋아하는 것들을 저도 좋아하게 된 경우가 많았어요. 예를 들면, 달리기라던가, lp라던가, 티셔츠 … 이렇게 보면 하루키의 광팬인거 같네요. 태석씨는 하루키에 대해 잘 아세요?"
"그럼요. 얼마 전에 '해변의 카프카'를 처음 다 읽었는데 정말 좋았어요"
그리고 태석은 그 장편소설의 어떤 점이 좋았는지 설명한다.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15살 소년 카프카가 가출을 하게 되어 '세계에서 제일 터프한 15세 소년'이 되기 위해서 세상을 헤쳐나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태석은 카프카가 가진 생각이나 신념에 대해서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크게 와닿았다고 말했다.
"카프카가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장면을 읽을 때, 저도 운동을 하고 싶어져서 그 길로 등산을 하러 나간 적이 있어요. 또 카프카가 어떤 지방쪽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때는 저도 끝까지 읽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 책을 몇 시간동안 읽어내려 갔죠"
서영은 태석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눈치였다. 그리고는 서영 자신도 하루키가 취향이나 가치관이 뚜렷하고 배울 점이 많은 작가인 거 같다고 생각한다고 하며, 태석의 말을 기억하고 그 소설도 꼭 읽어보겠다고 말했다.
태석은 마치 우리 둘이 독서 모임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저는 토요일마다 독서모임에 나가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2시간이 훌쩍 지나가는데, 정말 유익한 시간이에요. 인문학 도서나 소설을 다룰 때 특히 좋은데, 하루키의 책도 몇 번 만난 적이 있어요"
서영은 자신도 그 모임에 참석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혼자 책을 쓰고, 글을 쓰는데 익숙해져 있다면 독서 모임에 참석해보는 것도 좋은 시간일 것이라고 태석은 이야기했다.
둘은 그 이후로도 오랜 시간동안 여러 주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다. 음악, 취미, 가족, 직장, 서영이 기르는 고양이까지도 말할 기회가 있었다. 서영은 자신이 기르는 슈미의 사진을 보여주고는 행복한 표정으로 귀엽지 않아요? 라고 말했다. 태석은 웃으며 그렇다고 말하며, 자신이 슈미를 잠깐 안아서 서영에게 데려다 줄 때 잠깐 보았지만 순하고 말을 잘 듣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영은 꼭 그런 때만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하며 웃는다.
금방 친해진 둘은 연락처를 나눴다. 계기가 있었는데, 태석은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인 '민물장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다가 얼마 뒤에 있을 단독 콘서트에 혼자서 갈 것이라고 말했다. 서영은 원래 밴드음악을 좋아한다며 그 밴드도 들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서영씨. 주말에 밴드 공연 같이 가볼래요?"
서영은 일단 좋다고 말하며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태석의 연락처를 물었다. 그 날 시간이 날지 안날지 정확하지 않으니, 확정이 나면 연락을 꼭 주겠다고 말한다. 태석도 서영의 연락처를 물었다. 둘은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에 각자의 직장으로 향하기 위해 작별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