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 방학은 문학의 뜨락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학원생에게 방학이라는 것은 없지만, 모처럼 학부생의 삶을 공유하며 함께 놀러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학기 중에 매주 화요일 있던 정모를 대신해서 같은 시간에 소설 읽기 모임도 했는데, 덕분에 한강의 <채식주의자>, 김애란 <비행운>, 황정음 <백의 그림자>, 박민규 <카스테라> 등 추천받은 한국 소설들을 읽으며 여러 영감과 열망을 얻기도 했다.
그중에서 가장 좋게 읽었던 책은 마지막 주에 읽었던 양귀자의 <모순>이라는 소설이었다. 쌍둥이로 태어난 엄마와 이모, 결혼을 염두에 두고 만나는 상반된 성격의 두 남자. 주인공 안진진이 주변의 인물들을 보며 느끼는 삶의 아이러니에 다분히 공감하며 정말 재밌게 읽었다. 묘사도 좋고, 내가 어렴풋이 느끼던 바를 잘 대변하는 문장들도 여럿 있었다.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불행의 과장법,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다른 점이었다."
위의 시는 저 부분을 읽고 메모한 내용에서 출발했다. 나는 가끔 불행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고 나 죽네, 대학원 오지 마세요. 이렇게 엄살 섞인 엄포를 부리고 나면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 같은 마음이랄까, 주위의 동정과 응원을 연료 삼아 다시 나의 불행을 마주할 수 있다. 어쩌면 과장하고 호소할 것이 불행뿐인 나의 삶은 퍽 행복한 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삶에는 많은 모순들이 존재한다. 가끔은 너무 스스로가 초라하고 한심해서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술자리에서 잔뜩 신나 떠들다가도 화장실 소변기 앞에서 한숨을 내쉬다가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을 마주할 때 나는 글을 쓰고 싶어진다. 재밌잖아. 곱씹어보면 말도 안 되는 그런 현상들을 우리가 공유할 수 있다는 게, 신비롭고 애틋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해석해내면 사람이 좀 더 발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정반합.
가을 학기가 시작하고, 또 새로운 사람들이 잔뜩 모여든 뜨락에서. 나를 소개하는 첫 글로 위의 시를 들고 갔다. 그냥 족쇄 풀고 "용구" 해버렸다. 진짜 한 줄 한 줄에 모순과 역설과 말장난을 꾹꾹 눌러 담아 고봉밥 같은 글을 써봤다. 한 줄이라도 닿기를 바라는 마음에 평소의 나보다도 더 뇌절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부끄러워서, 셀프 디스이자 변명이자 부탁으로 뒤의 세 연을 적었다. 시답지 않은, 시답잖은 시를 쓰는 시시한 인간. 애(哀) 쓰는 와중에도 웃기고 싶어 하는 놈. 그래도 어여삐 봐달라고.
들고 가서 낭송하는 동안에도 잘 쓴 글 같지는 않아서, 나름 최연장자인데 이렇게 우스워져도 되나 많이 서글펐다. 어른은 못 되는... 그래도, 잘 쓴 글은 아니지만 이런 글, 나보다 잘 쓰는 놈 없을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