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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Mar 16. 2021

자정 산책

오늘과 내일의 경계에서

자정 산책

                                인용구

오늘과 내일의 경계에서
잠시 발걸음을 늦춰본다

 

오늘은 기억에 남을 하루였는지
어제의 다짐은 부끄러움으로 남지 않았는지
몇 걸음 뒤에 만날 내일에서 나는 무엇을 기대하는지

묻고, 때론 묻고... 
때 묻은 나는 무딘 눈빛으로 고개를 든다


하늘물이 맑아서 깊은 곳에 잠긴 별도 볼 수 있는 밤

수십 광년을 날아온 어제의 빛들은
오늘의 밤을 밝혀 내일을 꿈꾸게 하였으니  

시곗바늘이 비밀스럽게 만나는 동안
푸른 어둠에 세수를 하자
미련한 나에게 삶은 다시 하루를 선물하였음에
걷자 어제를 걷어내고 내일을 걸어보자




 봄이 오기는 했나 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낮의 선선함을 믿고 얇은 옷을 입었다가는 오들오들 떨면서 퇴근해야 했는데, 이제는 밤에 자전거를 타도 손이 시리지 않다. 벚꽃이 만개한 캠퍼스를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밤이 짧아지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말이다.


 요즘은 자정 가까이에 퇴근을 한다. 10-to-10, 대학원을 처음 들어올 때 안내받았던 암묵적인 출퇴근 시간은 오전 오후 열 시였으나, 딱히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퇴근한다고 트집 잡는 선배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기상시간이 늦어졌다. 그래도 연구실에서의 시간도 열두 시간 채운다는 마음으로 퇴근 시간에도 연연하지 않다 보니 11시를 넘어서 퇴근하는 일이 잦았다. 자연스럽게 '자율(自律)'에 대해 생각해본다.

 대학교와 고등학교의 가장 큰 차이는 자율성에 있다고 했던가. 그런데 대학원과 학부 생활도 자율성 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학부에서는 월화수목금 수업 일정이 있었고 매주 동아리 정모에, 쉴 틈 없이 쏟아지는 과제들을 해치우면 일주일이 금방 흘렀다. 대학원은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인 데다 별다른 감시나 간섭도 없으니, 정말 해이해지자면 끝도 없이 풀어지기도 한다. (물론 이것 역시 랩바랩, 사바사다.) 고백하자면 요 며칠 유튜브를 몇 시간째 보다가,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구나 오늘!' 하고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 밀린 일 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니 '요즘은 자정 가까이에 퇴근을 한다'라는 말을 해도 여러분이 나를 대단하게 생각하거나 안쓰러워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자율과 자유는 다르다. 대학원생에게 자율성은 보장되지만, 그렇다고 대학원생이 자유로운 존재인가? 하면 아니니까. '대학원생=노예'라는 자조적인 밈이 말하듯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은 절대적인 갑을관계에 놓여있다. 교수님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지는 않지만, 나는 매 분기마다 (학회 시즌마다) 결과로 증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구실에 앉아 농땡이를 피우는 동안에도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한껏 게으른 뒤에는 언제나 작지 않은 현타가 찾아온다.

 그래서 자율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자율, 스스로의 원칙. 내게 하루 종일 연구에 매진할 집중력은 없다.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바꾸는 찰나에도 SNS와 유튜브의 꾐에 당하고 만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만의 원칙을 만들어 놓아야 의지력이 부족한 집중력을 지탱할 수 있지 않겠나. 슬프게도 나는 MBTI 마지막 알파벳이 'P (직관형)'인 사람이라 계획을 따르는 것을 참 못한다. 이것 봐, 나의 의지박약을 합리화하려 믿지도 않는 MBTI를 팔잖아. 그 정도로 간사한 놈이다 나는.

 그럼에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지라 (크흠) 퇴근길에 반성을 자주 한다. 그냥 밤의 성질이 그렇다.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오늘 하루 떳떳하게 살았는지, 어제 하기로 했던 일들은 모두 끝냈는지. 내일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있는지 머릿속으로 정리를 해본다.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 어제의 다짐은 다 짐이 되고, 내 일은 내일로 미뤄진다. 그러고도 자주, 부끄러움마저 잊는다.


 이 시에 민망한 포인트가 한둘이 아니다. "묻고, 때론 묻고 / 때 묻은 나는 무딘 눈빛으로 고개를 든다"라던가, "걷자 어제를 걷어내고 내일을 걸어보자" 같은 중의적 표현을 버무린 문장들이 좀 억지스럽지, 싶다. 나머지랑 분위기도 안 맞는 것 같고... 예를 들면 4연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드는 바이브거든. 그런데 오늘은 "미련한 나에게 삶은 다시 하루를 선물하였음에" 구절이 유독 민망하더라. 미련한 것아, 그걸 알면서 오늘도 그렇게 보냈단 말이냐. 내일은 좀 정신 차리고 살자.

 오랜만에 '자율'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산책을 해야겠다. 이번 주 목표와 내일의 할당량을 정리할 생각이다. 하얗게 목련꽃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니 봄이 맞다. 천천히 밤이 짧아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자정 무렵의 밤은 계속 깊고 진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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