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에 기억이 더해지면 괴로움
이 글을 페이스북 인용구 페이지에 처음 올렸을 때, 나는 이 글이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을지 몰랐다. 언어유희로 점철된 詩답잖은 시. 당시 머릿속을 맴돌던 표현들을 어딘가는 내려놓고 싶어 빠르게 쓴 글이었고, 그런 까닭에 제목도 짓지 않았다.
그런데 문학 동아리 친구가 이 글을 읽고 너무 좋아해 주는 것이었다. 따로 연락이 와서, 온갖 칭찬과 함께 이 글을 학교 커뮤니티 페이지에 올려도 괜찮겠냐는 말을 해주어서 나는 잠시 고민 후에 좋다고 했다. 대신 익명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구독자 100명 수준이었던 개인 페이지에서도 꽤 많은 따봉이 눌린 까닭에 내심 잘 썼나 뿌듯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카이스트 사람들이 다 보는 커뮤니티에 올릴 이유는 딱히 없었다. 이공계 학생들로만 이뤄진 커뮤니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줄지도 의문인 데다, 시원찮은 반응을 받으면 또 좁은 학교에서 얼마나 민망하겠냐. 그래도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 익명으로 올리는 것까지는 OK를 해본 것이다.
그리고. 예상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글을 좋아해 주셨다! 친구의 호들갑에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나는 관심종자라 엄청 기뻤다. 새로고침 할 때마다 추가되는 따봉과 댓글에 그날 하루는 휴대폰을 한시도 놓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는 아예 알람 설정까지 했다고. (아직도 간간히 댓글이 달리면 알람이 온다. 짜릿해...)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해당 게시물을 캡처해서 "카이스트 시인.jpg", "카이스트 문예창작과" 등의 제목과 함께 온갖 곳에 퍼 날라졌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가끔 커뮤니티에 들어가 댓글을 보면 꽤 자존감이 충전되기도 한다. 헤헤.
댓글에 '이런 글 쓰는 사람은 누굴까'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이 글의 주인이 나요! 나!" 외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한편으로는 '카이스트 시인'의 정체가 탄로 난다면 그건 또 그들에게 내심 실망감만 안겨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초절정 미남에 당당한 필(筆)모그래피를 갖추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당시의 나는 시를 쓴 지 첫 돌도 지나지 않은 아싸 애송이였기 때문에. 다만 글쓰기가 취미라고 얘기했을 때 간혹 저 글이 회자되는 경우가 간혹 있었고, 그럴 때마다 "그거 제가 쓴건데..." 하며 수줍어 하고는 했다.
저 시가 나의 희대의 역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굳이 자랑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어떻게 살았길래 이런 글을 썼어요'라는 질문을 가끔 들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연애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고, 막 절절하게 썼다기에는 솔직히 좀 작위적이지 않나? 무엇보다 "나는 시였다"라니 그런 비대한 자의식을 어떻게 면전에서 드러낸단 말이냐. 또 이 글을 통해 나를 알게 되는 사람들은 내 시에서 언어유희나 펀치라인을 기대할 것 같아서, 그걸 매번 만족시킬 자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쓰고자 하는 시의 지향점과는 사뭇 다른 글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덕분에 '그래서 내가 평소에 쓰는 시는 어떤 시인데? 나는 어떤 시를 쓰고 싶은데?'라는 고민을 진지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나고 보니 나는 아직도 말장난을 즐겨 쓰는 글 짓는 광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어찌 되었건 <나는 시였다>는 나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빠질 수 없는 작품이다. 'ㅚ로움 + ㄱ = 괴로움'은 지금 보아도 정말 잘 쓴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때 받은 응원은 공대생의 신분으로서 시 쓰기라는 행위를 이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요즘도 가끔씩 페이스북 따봉 페이지에서 불펌해서 광고 붙이고 돈을 버는 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살짝 배가 아프기도 한데, 그래도 기쁘다. 아직도 내 글이 사랑받고 있는 것이. 내 자식 같은 문장들을 다정한 눈길로 쓰다듬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끝으로 시에서 썼던 음계 트릭을 썼던 다른 시도 함께 공유한다. 이것도 많은 분들이 귀여워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