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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Nov 28. 2022

불치병이라 했다. 치사율 백 퍼센트.

                        인용구

1
   불치병이라 했다. 치사율 백 퍼센트. 부모에게 물려받은 이 지독한 질병은 죽는 순간까지 나를 쫓아다닐 것이었다. 열 달의 잠복기 끝에 삶을 선고받은 나는 말도 잃고 그저 목놓아 울었더랬다. 세상은 천장 없는 병동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죽어갔다.

   환자는 서로를 알아보았다. 너도 앓고 있구나, 하고 삶을 진단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불렀다. 환자들의 보살핌 속에서 기억은 조금씩 돌아왔다. 걷고 말하고, 규칙적으로 경련하는 가슴의 증상에 익숙해질 때 즈음, 나는 부모의 이마에서 균열처럼 번지는 죽음을 보았다. 삶은 지독한 것이었다.
   삶은 감정이란 합병증을 동반한다. 나는 가끔 아팠고, 그보다 자주 슬펐다. 부모는 물려준 삶을 미안해했다. 그게 화가 났다. 삶의 재생산은 비극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 삶을 부정하고 있었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무서워도 무섭지 않은 척. 영영 죽지 않을 사람처럼, 내일 죽는 사람처럼 나를 두었다. 그러자 많은 것이 괜찮아졌다. 손목을 그어도 괜찮을 것 같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2

   이름 없는 날들이 지나고, 너를 만났다. 나는 한눈에 너를 알아보았다.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 사이에 네가 있었다. 흉터도 될 수 없는 상처들을 기꺼이 내비치며, 너는 삶이라는 병마에 맞서고 있었다. 나는 초연했으나 너는 의연했다. 너는 누구보다 심하게 삶을 앓았으면서도 나를 대신해서 아파주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함께 진통제를 삼킬 때 네가 했던 말이 있었다. 술의 성분처럼, 담배의 연기처럼, 그날 밤의 가벼운 대화는 무겁게 내 안에 잔류했다. 그날 나는 병상에 누워 한참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오랫동안 무시했던 가슴의 증상이 나를 일으켰다. 그래서 한 번만, 네 말대로. 죽을 때까지만 살아보기로 했다.

3
   삶은 지독한 것이다. 내가 나를 놓지 않을 때도 삶은 나를 놓지 않았다. 서로를 간호하는 동안에도 삶은 끊임없이 전염된다. 우리는 평생 환자일 것이다. 그 뜻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며칠 전에 출근을 하다가, 낙엽 하나가 떨어지는 풍경을 본 적이 있었다. 전날 내린 한 차례의 비로 대부분의 가지들은 앙상하게 겨울을 맞이한 뒤였는데, 질기게 붙어있던 마른 잎 하나가 마침내. 낙하하는 것이었다. 떡갈나무 이파리는 홀로, 마치 주인공처럼 천천히 떨어졌고 나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잎이 땅에 닿는 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그 고요한 광경에 압도당한 나는 알 수 없는 여운을 느끼며 잠시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생각해보니 낙엽이 떨어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그러니까 이파리가 땅에 닿기까지의 세월은 그 10초 남짓한 시간이 전부가 아니었다. 가지에서 떨어지기 전부터 잎은 땅을 향할 운명이었으므로. 다시 말해 저 잎은 봄 어느 날 탄생한 순간부터 푸른 여름의 시간을 거쳐 오늘, 내 눈앞에서 땅으로 떨어진 것이다. 낙엽은 수개월에 걸쳐 떨어진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죽음도 숨이 멎는 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생애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이겠거니 싶었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서서히 죽어간다.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종말을 향해 매일 하루의 속도로 나아간다. 젊음의 활기는 저 너머에서 기다리는 죽음의 존재를 외면하게끔도 하지만, 얼마나 당신이 건강하든 삶에 간절하든 예외 없이 우리는 모두 시한부이다. 


    글에서는 삶을 질병에 빗대보았다. 그렇게 적은 첫줄이 꽤 묵직했다. 치사율 100%의 불치병. 그러자 삶이란 막연한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고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무겁게 다가왔다. 삶이 질병이라면, 이라는 가정을 - 정확히는 해석을 - 이어나가자 제법 병리적으로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 뱃속에서의 열 달은 '삶'을 선고 받기 전의 잠복기. 가슴의 규칙적인 박동은 '삶'의 증상. 그렇다면 우리를 아프게 하는 통상적인 질병들은 '삶'의 합병증이었고, 그 중 가장 지독한 것은 감정이었다.

    개인적으로 글 자체로만 다지면 제 1 단락이 제일 마음에 들었으나, 그렇게 암담한 내용으로 일단락하기에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또 '너'를 등장시키고. 희망적인 끝맺음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이것은 내 글의 고질병이다.) 삶을 질병이라고 두었을 때, 우리가 병마를 이겨내는 자세는 무엇이어야 할까. 결국은 환자들의 연대가 아닐까 싶었다. 삶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연민하고 보살피면서 견디는 것. 역설적으로 그 과정에서 삶은 더 깊어지고, 끈질기게 우리에게 달라붙는다. 유전으로 물려받은 삶이지만, 그것은 때로 서로를 통해 전염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기에. 서로의 투병을 응원하며, 언젠가 닥쳐올 죽음의 순간까지는 '죽어간다'는 마음보다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 그것이 삶과 죽음, 운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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