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기가 천원을 뱉어냈다. 구겨진 돈은 받지 않겠다는 완고함을 두 차례 더 확인한 후, 빳빳한새 지폐를 꺼냈다. 얇은 입구로 낚아채지 듯이 빨려 들어가는 지폐에 손가락이 베였다.
앗.
잠시 손을 살피다가, 허리를 숙여 음료를 꺼냈다.
나는 왠지 서러워졌다.
요즘은 현금을 거의 들고 다니지 않아 자판기를 이용할 일도 없지만, 중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동네 평생학습관 휴게실에서 음료수를 자주 뽑아먹곤 했다. 천원 지폐를 넣고 700원, 800원짜리 음료수를 마시면 동전이 늘 주머니에서 짤랑거렸다. 그렇게 모은 동전으로만 음료수를 한 캔 뽑아 먹을 수 있게 되면 왠지 쿠폰을 모아 서비스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더군다나 동전을 하나하나 집어넣을 때는 저금통에 돈을 넣는 것과 감각이 비슷해서, 값을 지불하는 것보다는 더 숭고한(?) 일을 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용케 동전을 모아왔구나! 착한 아이에게는 음료수 선물을 주마,' 라며 자판기 아저씨가 칭찬하면 나는 허리 숙여 인사드리고는 배출구에서 차가운 콜라를 꺼냈다.
자판기 아저씨는 다소 불친절했다. 음료수를 젠틀하게 건네주면 좋았을 것을, 꼭 우당탕 텅그렁 떨구어서 탄산음료는 캔 아랫면을 두드리며 (다독이며) 진정시킨 뒤에 따주어야 했다. 또 자판기 아저씨는 절대 귀퉁이가 구겨진 돈은 받지 않았다. 지이잉 지폐를 끝까지 스캔한 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퉤 뱉어냈다. 그럼 나는 지폐 끝을 열심히 세워 다시 넣었다. 그렇게 자판기의 깐깐한 기준을 통과하면 나름의 성취감도 있었지만, 결국 다른 지폐를 꺼낼 때에는 답답함에 콜라 한 캔이 더 필요할 지경이었다. 뭐 그래도. 기계한테 짜증내봤자 무엇 하겠나. 지나고보니 다 추억이다. 쨍쨍한 여름날, 매미 소리, 자판기 옆 벤치.
사실 요즘도 지폐 투입구를 자주 마주한다. 기숙사 세탁기는 공짜로 사용 가능한데, 빨래 건조기를 50분 돌리는데 천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예전만큼 자판기가 까칠하게 지폐를 받지는 않더라. 그냥, 잘 먹는다. 돌이켜보니 어렸을 때에는 지갑도 따로 안 들고 다니고 주머니에 꼬깃꼬깃 천원을 접어 다녀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참. 추억이 맞다.
무튼, 시랑 별개로 자판기에 대한 추억을 잠깐 늘어놓아봤다. 시에 대해서는... 마지막 문장의 '서러움'에 여러분이 공감을 조금 하시려나 싶다. 위의 글에서 혹시 '기계화가 고도화되면서 나타나는 인간성의 상실과, 부당한 자본주의 권력 앞에서 상처 받지만 그럼에도 권리를 챙기기 위해 허리 숙여야 하는 현실에 대한 씁쓸함' 같은 걸 읽었다면. 당신의 혈관에 빨간 피가 흐르는 것일지도(?!)
끝으로 자판기는 양반이지, 키오스크 너무 답답해. 응답시간도 느리고 자꾸 쓸데없는 거 추천해서 끼워팔기 하려는거 너무 짜증난다. 전국의 패스트푸드 체인들은 각성하여 더 나은 UX를 제공하기를 바란다. (글의 결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