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뽑아내느라 한참을 아팠다
인용구
스물여덟,
다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깊은 곳에 또 니가 있더라
입 안에 묻어두었던 단어가
혀 끝에 닿아 욱신거렸다
덧난 사랑이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가지런한 것들을 누르기 시작했다
이미 소중한 이들이 많았던 나는
너의 존재를 허락할 수 없었다
너의 잘못이 아니란 것쯤은 안다
뿌리의 기형도, 어긋난 방향도
조용히 썩어 들어간 속을 알면서도
나만 외면하면 괜찮을 줄 알았다
침대에 누워
얼굴엔 환한 빛이 쏟아지는데
나는 너를 뽑아내느라 한참을 아팠다
사랑이여, 너를 두었을 때의 아픔을 생각하며
떠나보내는 아픔쯤은 견뎌보려 했는데도
나는 정말, 시리도록 아팠다
며칠 전에는 사랑니를 뽑았다. 치의대를 다니는 친구가 임상에 들어가더니 작년부터 내 이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친구에게 이를 드러내고 누워있는 게 퍽 민망한 일이라 몇 차례 사양했는데, 최근 학교에서 받은 검진에서도 사랑니에 충치가 있다며 발치를 권장하길래 결국 이를 뽑기로 했다.
사랑니를 뽑는 과정이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마취가 잘 됐고, 의사의 실력이 좋았다. (이렇게 하면 되니 지원아) 덕분에 진료용 의자에 누워서 가만히 상념에 잠길 수 있었다. 뭔가, 좀 어이없는데, 사랑니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한참 했다.
사랑니는 존재 자체가 시적이다. 어릴 때 나는 스물여덟 개의 영구치, 그리고 사랑을 알 즈음에 나기 시작한다는 네 개의 사랑니. 위아래 사랑니끼리 잘 맞물리기만 한다면 뽑을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사랑이 으레 그러하듯, 사랑니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자라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엄한 곳을 아프게 해서 결국 뿌리 뽑아야 한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모두가 권고한다.
사랑니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사랑니에게 충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그 충치가 자라게 내버려 둔 것도 나였다. 늦게 자랐다는 이유로, 이미 잘 자리 잡은 다른 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아무도 원한 적 없었던 존재, 사랑니는 누군가의 임상 실습용으로 뽑혀 나간다. 가끔 엄청나게 공포스러운 뿌리의 사랑니 사진을 보곤 한다. 뽑을 때 엄청 아프겠지, 나는 그게 사랑니의 마지막 심술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렇게라도 입 안 깊숙한 곳에 머물고 싶었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나의 사랑니는 고통 없이 나에게서 떠나 주었다. 뺀찌도 아니고 빠루로 이빨을 열심히 들어내는 것 같았는데, 한참을 그렇게 들어내길래 언제 끝나려나 하다가 문득, 내가 긴장해서 힘주고 있는 것이 혹시 괜히 이빨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긴장을 풀었더니 거짓말처럼 끝났다고 해주더라. 그럴 리 만무했겠지마는, 내가 놓아주었을 때 마침내 끝난 기분이 들어서 아주 복합적으로 시원섭섭함이 몰려왔다.
위의 시는 사실 한 2년 전에 썼던 글이긴 하다. 스물여덟 살쯤에 발표를 했다면 첫 행이 더 중의적으로 와닿았겠구나 싶긴 한데, 마침 내 (마침내) 첫 사랑니를 뽑았으니 '지금이니' 싶었다.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둘 거야
이은미의 <애인있어요> 노래 가사처럼, 비밀스러운 사랑을 했던 적이 있다. 사랑? 연정. 끝내 짝사랑이라고도 부를 수 없었던 감정이었으니.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나는 한참을 앓았다. 어쩔 줄 모르고, 어쩌지 못하다가. 그래도 어느 날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감정이 절제(節制)되더라. 그렇게 절제(切除)에 성공했다. 그때 당신과 함께 많은 것이 떠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니를 뽑을 때는 아픈지 몰랐는데, 피가 쉬이 멎지 않아서 그날 고생 조금 했다. 마취가 끝난 후에야 시큰하게 사랑니 없어진 자리가 아려왔다. 지금도 사랑이 없어진 자리가 허하다. 그 자리에 들어가는 모든 것에 이물감이 든다. 새 살이 돋을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