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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Jan 21. 2023

모래시계

내 사랑은 한없이 잇닿은 기다림

모래시계

                                                인용구


세계가 뒤집힌 그날 후로도 시간은 건조하게 흐르고 있다

먼저 간 네가 그리워서 홀로 사막을 걷고 싶었다

모래알 같은 별들이 머리 위를 수놓은 곳

은하수가 쏟아질 것처럼 일렁이고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달빛

걸어야지 걸어야지

세상 저편에

.

.

.

.

.

가 있으므로

나의 사랑은 한없이 잇닿은 기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나는 너에게 간다



가끔 이유 없이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의 구절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막연한 곳으로 산책을 가고 싶어진다. 글의 내용이 제목만큼이나 즐거운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읽으면 제법 마음이 명랑해진다. 그 이유는 나의 쓸쓸함이 어떤 그리움으로 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허무하게 흐르던 시간이 문득 '기다림'처럼 느껴지면, 사막 어딘가에 우물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나는 그것을 조금 더 희망찬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함께 연상되는 시로는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있다. "사랑하는 이여 /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지금 해설을 쓰면서 느끼는 건데, 그냥 내가 그린 시가 황지우, 황동규 시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 같기도 하고. 처음부터 두 글에 영감을 받아서 그렸던 시는 아닌데 함께 보니 조금 더 좋은 것 같아서 시의 마지막 두 행을 그 둘에서 인용하는 것으로 수정했다.

우주는 모래시계와 같아서, 하나의 상태가 끝나면 다른 상태로 넘어갈 뿐 무엇도 영영 사라지거나 무에서 창조되지 않는다. 나의 몸을 이루는 원자 중 몇 개는 한때 별이었다. 나의 연인을 이루던 것들의 일부는 나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니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닐 것이다. 모든 존재와 존재 사이 존재하는 만유인력처럼, 붉은 실로 이어진 우리의 인연이 고작 죽음이나 이별 따위로 끝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모래시계 안의 모래의 양은 유한하지만 그것으로 잴 수 있는 시간은 무한하듯,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봤자 평생이겠으나 나는 가끔 영원을 가늠한다. 삶과 우주는 영원한 순환이고, 순환은 곧 재회니까. 이승환 노래 가사처럼, 우린 어떻게든 무엇이 되어있든 다시 만나 사랑할 것을 믿게 된다.

모래시계 모양이라 하면 흔히들 마주 보는 삼각형 모양 (⧗)을 떠올린다. 그런데 사실 내가 모래시계에서 가장 사랑하는 부분은 그 모양에선 누락된, bottleneck부터 아주 가늘게 흐르는 모래줄기 부분이다. 희미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그 얇은 선이, 나뉜 두 세계의 모래들을 이어주는 모습이 퍽 감동스러워서 그렇다.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너에게 간다. 너의 세계로 하염없이 곤두박질친다. 그 모습을 시에 담고 싶었다. 그리고 보니 칵테일잔 같기도 하고. 다음에 칵테일 마실 때 생각나겠다. 여러분도 떠올려주면 좋겠다.

내 사랑은 자주 기다림의 형태를 갖는다. 한때는 그것이 원망스럽고 서러울 때가 있었으나, 지금은 기다리는 것이 힘들지 않다. 언젠가 내게도 사랑이 올 것이다. 아니, 사랑에게 내가 갈 것이다.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즐거운 편지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연구실에서 이렇게 생긴 인테리어 소품을 받았었는데 너무 좋았다. Sandscape라고 치면 나와요. 이거 보면서 글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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