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6. 넷플릭스. <장송의 프리렌>을 N차 정주행하다
하도 이것 저것 많이 보다 보니, 오히려 쓸 말이 점점 없어진다. 그럴때는 모름지기 내가 제일 아끼던 것들을 꺼낼 때다. 가장 사랑하는 보석같은 작품들 중 하나인 <장송의 프리렌>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장송의 프리렌에 대해 알게 된건 친구로부터였다. 그날 처음 만나는 날이었는데 장송의 프리렌 티셔츠를 입고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확하진 않다.) 첫만남부터 찐은 찐을 알아본다고, 꽤 오랜 시간 오타쿠 토크를 했던 것 같다. 나는 나를 패션 오타쿠 정도로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나를 완전 오타쿠라고 생각한다.(왤까?) 그날 <장송의 프리렌>에 대한 추천을 엄청나게 받고 돌아온 후 넷플릭스에서 쭉 정주행하게 되었다. 매일 언제나 불특정 다수의 콘텐츠를 배경음처럼 틀어 두고 생활하는 나는 스치듯 들으면서 콘텐츠를 빠르게 스키밍하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장면이나 대사가 나를 사로잡으면 진지하게 그 콘텐츠를 파고든다. 그렇게 사로잡히게 된 콘텐츠는 다 각자만의 이유가 있는데, <최애의 아이>는 말도 안되게 빠른 전개 방식에 놀라 몰입하게 된 케이스였다. 하지만 장송의 프리렌은 전혀 반대의 이유였다. 느릿하고 천천히 시간을 곱씹는 이 작품은 이야기 자체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순간 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까운 기분으로 천천히 작품을 집중해서 보았다. 몇번이고 다시 돌려 봐도 매번 벅찬 이야기가 내가 가보지 않은 세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처럼 남는다. 내 최애 애니를 꼽자면 <XXX홀릭>과 바로 이 <장송의 프리렌>이라고 할 수 있다.
던전 계열 중세 판타지 계열에는 클리셰가 있다. 모험을 꾸릴 때 인간 용사, 엘프, 마법사, 성직자, 소인족 등의 구성원이 서로 상호 보완하는 스쿼드를 만든다던가, 엘프는 오래 산다는 설정이라던가, 이들의 모험의 최종 보스는 마왕이고 마왕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모험을 떠나는 스토리라인 등. 이미 거의 아키타입(archetype)라고 할수 있는 설정이다. 이런 설정값을 <장송의 프리렌>은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대신 첫 화는 이런 전형적 클리셰의 끝에서 시작한다. 마왕을 무찌른 용사 무리가 마을로 금의환향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마을은 잔치 분위기가 되고, 용사 무리는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는 화려한 엔딩을 시작점으로 삼아 시간이 한참이 더 흐른다. 용사 무리는 해산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곳에서 클리셰의 설정값이 "그런 설정이래" 이상의 효과로 증폭된다. 바로 시간이 이 용사 무리에게 공평하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젊었던 용사는 머리카락이 다 빠진 대머리 노인네가 되었고, 성직자도 지긋한 할아버지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오래 사는 드워프는 이제 전장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인간을 낡게 만든 그 시간은 억겁의 시간을 살아가는 엘프에게는 그저 찰나이다. 마치 엘프의 시간은 시침, 드워프의 시간은 분침, 인간의 시간은 초침과도 같다. 엘프인 프리렌은 생긴 것도, 체력도 그닥 달라지지 않았다. 반면 용사는 나이가 들어 죽음을 맞이한다.
장례식을 치르며 프리렌은 후회한다. 왜 인간이 오래 살지 못함을 알면서도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나, 생각하게 된 프리렌은 시간을 거꾸로 걸어보기로 결심한다. 용사 일행과 함께했던 모험의 여정을 다시 돌아가 보기로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용사 일행이었던 하이터의 주변에서 잠깐 살다 그의 장례식을 지키고 난 후 하이터가 돌보던 페른의 스승이 되기도 하고, 아이젠의 제자 슈타르크와 여정을 함께하게 되기도 한다. 이 여정에서 자인과 잠깐이나마 동행하기도 한다. 프리렌은 천년 전 만난 자신의 스승 플람메의 가르침을 이어 가며 여러 민간 마법을 수집한다. 스승 플람메의 스승이었던 제리에를 만나기도 한다. 이 과정이 프리렌이 시간을 천천히 곱씹는 속도만큼 느리게 진행된다. 수천년을 산 엘프의 기억을 통해 다양한 과거가 소환된다. 용사 힘멜과 함께한 가까운 과거, 천년 전 자신의 스승과의 대과거, 어린 힘멜을 만났던 가까운 정도에서 조금 더 먼 과거 등. 과거가 하나의 시간선으로 뭉개지지 않고 한 엘프의 기억 속에서 촘촘히 엮여 있다. 반시계 방향에서도 다양한 시간선을 오가며 이 과거들을 탐험하는 경험을 애니메이션을 보며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거의 조각들이 어떻게 맞물려 현재의 결과를 만들게 되는지를 또한 보게 된다. 시간에 대해 그리고 시간의 속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훌륭한 작품이다.
양갈래 귀여운 외형의 프리렌이 압도적인 힘을 가진 마법사라는 점이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꼬꼬마였던 페른은 애니메이션이 진행되면서 어느샌가 프리렌을 껑충 넘는 키가 된 걸 볼 때에 시간의 흐름을 훅 느낄 수 있다. <장송의 프리렌>은 진짜 한 화 한 화 얼마나 좋았는지 백분은 넘게 떠들 수 있을 것 같다. 곧 새로운 시즌이 공개된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빨리 백발의 프리렌을 다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