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8. 쿠팡플레이에서 <브루탈리스트>를 보다
정말 보고 싶었지만 극장에 갈 여유가 없어 보지 못한 영화가 몇 있었다. 내내 구독하고 있는 OTT에 들어오지 않을까 기웃거렸다. 안되면 결제해서 시청하려던 차, 쿠팡플레이서 공개된 것을 보고 그날 밤 바로 시청을 시작했다. 도자 흙을 만지면서 가볍게 시작했다가 시청을 멈췄다. 정식으로 제대로 꼼꼼히 보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야작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입추가 지났다고 조금 선선해진 듯 기분이 좋았다. 동네에 숨겨져 있던 멋진 바도 발견했던 터. 지금 시기에 완벽한 하루를 상상해 본다면 저녁에 야작을 하고 느지막이 바에 친구와 만나 술 한잔 걸치며 이야기를 하다가 편의점을 들러 맥주와 안주 몇 개를 더 사와 집에 돌아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함께 짠을 하고 프로젝터로 브루탈리스트를 함께 조용히 보는 것. 다 보고 가만히 감상을 각자 담담히 머금고 잠에 드는 것. 상상만으로 완벽했다.
다시 처음부터 브루탈리스트를 보기 시작했다. 옛날부터 좋아했던 에이드리안 브로디. 가만히 있어도 우수에 젖어 있는 듯한 그의 눈, 휜 코, 유대계 얼굴 특징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배우에게 어떤 서사를 부여한다. 그동안 보여준 필모그래피의 행보 또한 그에게 겹겹의 아우라를 덧붙인다. 극 중 이름은 '라즐로 토즈'. 바우하우스 학파의 건축을 수학하고 부다페스트의 공공 건축물을 설계했을 만큼 인정받는 건축가였지만 유대인 학살을 피해 도망친 미국에서는 그는 아무도 아니다. 게다가 성격도 순종적이거나 유들유들하지 못하고 싫은 말도 기어코 해야만 하는 인물이다. 앵글에 유독 그가 다른 동성의 사람들과의 접촉의 형태가 미묘하고 헷갈리게 걸린다. 초반부터 나는 계속 의심하게 된다. 유럽에 자신의 와이프를 두고 온 상황이니 결혼은 했지만, 그가 과연 이성애자가 맞을까. 그의 지향성과 별개로 그는 그의 아내를 그리워하며 편지를 쓴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온갖 수모를 겪는다. 사촌의 도움을 받아 가구점에서 일하며 건물 리모델링 일을 따오며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까 희망을 품었던 찰나가 있었다. 그때에도 그의 사촌은 자꾸 라즐로와 자신의 아내와 이상한 관계를 종용한다. (이 부분에서도 또한 나는 라즐로가 과연 이성애자가 맞는가 의심하게 되었던 대목이다. 사촌 아틸라가 자신의 와이프를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라즐로에게 자신의 아내와 관계를 맺기를 종용하는 것 또한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는 그에게 동아줄처럼 보이는 리모델링 일에 몰두한다. 서재에 있는 물건들을 걷어내 건축물의 구조를 드러내고, 책장은 비스포크 방식으로 전부 수납할 수 있도록 벽의 곡선을 따라 만든다. 그리고 그 책장의 각도에 따라 빛이 들어오도록 설계한다. 마침내 보수가 끝난 날 우리는 그가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던 웅장한 청사진을 비로소 보게 된다. 그 장면으로 우리는 브루탈리즘이 무엇인지 바로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자재의 물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장식적 요소보다는 기능 자체로 최소로 축소된 골조 안에서 드러나는 미니멀한 선적-면적 요소, 그리고 빛. 이것이 브루탈리즘 건축의 핵심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오래가지 않는다. 자신의 아들과 딸이 이를 수주한 것을 모르는 집주인 해리슨 리 밴 뷰런은 노발대발하며 돈 한 푼 못 준다고 한다. 자신의 어머니가 요양해야 하는데 무슨 흑인이 여기 있느냐 하면서. 모욕적인 시대이다. 그런 모욕이 만연한 사회이다. 해리슨 또한 자신의 딸의 말을 은근히 무시하는 부분들이 나온다. 여성, 흑인, 유대인, 이민자 모두를 노골적이고 뻔뻔하게 욕보이는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대인 것이다. 지금 봤을 때에는 불편하다고 느꼈지만 그때는 묵살되었던 그 부분들을 잔인하도록 담담하게 풀어내는 부분이 이 영화의 탁월한 부분 중 하나이다. 결국 라즐로는 사촌의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공사판을 전전하는 라즐로를 해리슨이 다시 찾아온다. 자신이 당시는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했지만, 이후 라즐로가 보수한 서재로 화제가 되어 잡지에까지 해리슨이 실리게 되고, 해리슨은 그에게 당시 주지 않았던 보수를 주며 그를 파티에 초대한다. 이 해리슨이라는 인물 또한 흥미롭다. 그는 상당히 자기도취적이면서도 동시에 어떤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부분을 보인다. 그는 빛나는 재능을 선망하면서도 짓밟고 싶어 하고, 돈에 한없이 관대해 보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한없이 계산적이다. 해리슨은 파티에서 꽤나 즉흥적으로 라즐로에게 건축 의뢰를 하게 된다. 라즐로가 왜 건축을 하게 되었는지 묻는 와중에 누군가가 라즐로에게 말을 걸자 무례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그를 치워버린다. 라즐로가 전쟁이나 재난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건물을 만들고 싶어서 건축을 하게 되었다는 말에 깊게 감명을 받은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그는 갑자기 사람들을 추운 야외의 언덕으로 불러내 과장된 퍼포먼스스럽게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여기에 만들겠다고 연설한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기도취적이어서 놀랍다. 그의 행동은 라즐로에 대한 동정, 그리고 자신이 어떤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것을 후원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고 믿는 호승심,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다는 영웅적 행보에 대한 감탄이 섞여 있다. 그리고 라즐로는 그것이 무엇이었든 그것을 통해 자신이 만들고 싶은 건축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것을 기꺼이 한다. 상대가 굴욕을 준다 해도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그에게는 기회가 절박하다. 왜 이 기회가 절박할까. 아내를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말에도 어딘가 복잡 미묘한 표정이 스친다. 여기서도 자꾸 의심하게 된다. 분명 아내를 미국으로 데려온다는 목표는 그가 살아갈 이유이자 신념처럼 작용했다. 하지만 그 신념은 사랑인가 그저 신념인가?
인터미션 후에 그 사랑이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의 아내가 온 이후로 해리슨은 아내 에르제벳에게 미묘하게 수동공격을 한다. 라즐로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질투는 아닐까라고 자꾸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독점하고 있는, 자신이 후원하는 라즐로가 누군가의 남편이고, 그리고 그 아내가 사실 옥스퍼드에서 수학했던 저널리스트라는 점이 그의 열등감의 어떤 부분을 긁는다. 아내가 오면 마냥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라즐로는 복잡한 심경을 보인다. 에르제벳에 대한 애정은 어쩌면 그가 세워둔 살아갈 이유이자 의지에 가까웠다는 확신이 든다. 에르제벳 또한 복잡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자신을 여자로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자신이 골다공증으로 휠체어 신세가 된 것이 어떤 자격지심으로 작용했는지 남편에게 더 집착적으로 애정을 구하거나 조카 조피아에게 자신이 정말 남편을 너무 사랑한다고 거듭 강조하는 것 또한 그렇다. 옥스퍼드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유명 언론사에서 일했던 그녀는 당대에 엄청난 엘리트였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주저앉게 만든 전쟁은 그녀의 어떤 부분을 망가뜨린 듯하다. 해리슨의 호승심과 충동성에서 시작된 건축 프로젝트는 계속해서 현실적 문제에 부딪힌다. 처음에는 해리슨에게 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말라며 무엇이든 다 해줄 것 같이 말했던 것이나 건축 자재로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콘크리트를 쓰면 된다고 말하는 라즐로에게 어떻게든 대리석을 써야 한다고 말했던 것과는 다르게 돈이 많이 들자 마음대로 건축물의 높이를 줄여버린다던가 하는 식이다. 라즐로에게는 이제 더 이상 에르제벳을 데려오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게 된 이후로는 이 건축 프로젝트만이 그의 삶의 목표이자 전부가 되어 버린다. 그는 자신의 돈으로 비용을 충당할 테니 높이를 줄일 수 없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건축을 위한 자재를 싣고 오던 기차에 화재 사고가 나고, 프로젝트는 전면 중단된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주의.)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던 라즐로를 또다시 해리슨이 찾아온다. 그렇게 뒤통수를 맞아 두고서도 그 프로젝트를 맡는 게 맞을까, 생각하지만 라즐로는 고민 없이 하겠다고 한다. 그러고는 이탈리아에 석재를 보러 간 해리슨과 라즐로. 그리고 그곳에서 문제의 그 장면이 나온다. 해리슨은 약에 취한 라즐로를 강간한다. 이후 라즐로는 자신의 존엄성까지도 완전히 잃어버린다. 그에게 그 교회당만이 남은 유일한 것이다. 한때는 다른 불우한 사람의 아이를 먹일 빵을 구하기 위해 새벽에 대신 줄을 서 주겠다고 했던 그였는데, 이제는 장난을 친 어린 인부에게 폭언을 쏟아내고 해고를 해 버린다. 어느 날 밤, 에르제벳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약이 떨어진 상황에서 라즐로는 자신이 사용하던 헤로인을 에르제벳에게 투약한다. 그리고 자신 또한 헤로인을 투약하고, 둘은 영화 속에서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다. 근데 그 방식에서 에르제벳의 얼굴을 천으로 가린 채. 그리고 자신도 그녀도 약에 취한 채. 이런 모든 것들이 자꾸 눈에 남아 걸린다. 과연 라즐로는 전쟁 때문에만 미국으로 도망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 그의 마음을 자꾸 불편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는 왜 사창가에서도, 다른 여자들과도 제대로 관계를 맺지 않았을까.
에르제벳은 라즐로가 해리슨에게 성폭행당한 사실을 알게 되고, 그의 집에 찾아간다. 투자자들과 저녁 만찬을 즐기는 자리에서 에르제벳은 해리슨이 자기 남편을 강간했다고 폭로한다. 해리슨은 그 길로 사라진다. 그리고 라즐로가 만든 그 교회당에서 그가 죽은 듯한 암시를 주며 대목이 마무리된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라즐로는 건축 비엔날레에 초청받아 그동안의 업적을 칭송받는다. 그동안 입을 열지 않았던 조피아는 많은 청중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 그의 삼촌 라즐로는 언제나 과정보다 목적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며, 교회당은 라즐로와 에르제벳의 수용소를 상징한다고 말하며 둘이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사실 이 모든 이야기를 보고 나면 조피아의 연설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라즐로와 에르제벳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그 사랑의 형태는 그런 류의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라즐로가 그 교회당을 만든 이유는 그것이 자신을 지탱할 마지막 자존심이자 자신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존엄이자 인생의 목표였기 때문에 그는 건축에 매달렸다. 건축을 사랑해서 그 모든 수모를 참아가며 지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살아내기 위해 그는 건축을 사랑해야만 했다.
이 작품의 매 순간 앵글과 화면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초반 라즐로가 펜실베이니아로 떠나며 크레디트가 나오는데, 크레디트를 이렇게 열심히 본 건 처음이다. 건축적이고 디자인적으로 훌륭해서 크레디트를 읽게 만든다. 음악도 전형적이지 않으면서도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 희망이 보이는 것 같은 장면에서도 미묘한 불협화음을 들려주며 관객으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든다. 캐릭터 설계 또한 매우 입체적이다. 희망에 넘치고 영웅적이라 납작한 캐릭터는 없다. 모두가 적당히 훌륭하고 적당히 추악하다. 살아가다 보면 이에 공감하게 된다. 모두에게 힘든 시기는 있고, 힘든 시기는 사람을 졸렬하게 만든다.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면서도 누구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 있다. 그런 인간의 복잡하고 연약한 면모를 이 영화는 잘 보여준다.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의 이 영화는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다. 충분히 숨 고르기를 하고 영화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즐거운 영화가 될 것이다. 가장 치욕적인 시대를 살아내기 위한 한 사람의 건축에의 집착적 천착의 결과물은 더없이 거칠면서 한없이 섬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