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의 아이콘 <애마부인>의 비하인드

2025. 8. 넷플릭스 <애마>를 보다

by 김산

<애마부인>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에 나온 영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얼마나 시대를 풍미하는 아이콘이었는지는 잘 알고 있다. '애마부인'은 언제나 약간 '숭한' 대표명사같이 쓰였다. 유교적인 잣대가 유난히 공고한 우리 집에서는 '애마부인'은 약간 금단의 장르처럼 입에 올리는 일도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애마부인이라는 단어가 야함의 상징이라는 것이 그 침묵 속에서 더 깊게 자리잡았다. 독립해서 그 누가 뭐라하는 사람이 없는 성인이 되어서 다른 19금 영화나 외국 드라마들은 그렇게 줄기차게 시청했으면서도 애마부인을 보지 않았던 이유도 어떤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은 금단의 영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넷플릭스에 <애마>라는 작품이 나오게 된 것을 처음 들었을 때는 여전히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시청하기 버튼을 누르게 된 것은 내가 들여다 보지 않으려 구석으로 밀어 두었던 어떤 부분을 한번 들여다 보겠다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어릴 때 처음으로 술을 몰래 마셔본 것처럼 뭔가 두근거리고 배덕감같은 짜릿함도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야한' 것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지 않았다.


<애마>의 소재는 애마부인을 찍던 80년대의 영화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여배우가 애마부인 역을 거부하며 새로운 차세대 에로계 신예를 발굴하고 영화를 찍는 일이 주된 소재이다. 이 소재 자체가 너무 흥미롭고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촬영 현장에 대한 궁금함, 스크린에 전사되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그 너머의 현장의 이야기, 특히 에로라는 장르에서 어떻게 이루어질지 궁금했다. 크게는 어떤 방식으로 영화가 제작되느냐부터 자잘하게는 소위 에로 장르에서 남자 배우들이 어떻게 '공사'를 하는지에 대한 자잘한 궁금증을 충족시켜준다. 게다가 내용 자체가 야한 에로라는 장르 자체가 짜릿하지 않을 수 없다. 저 멀리 구석에 밀어두었던 원초적인 궁금증의 함이 열리는 좋은 소재다. <애마>는 영화를 찍는 과정을 찍는 만큼 씬인씬 장면들이 병치된다. 영화의 장면들과 시리즈의 장면들이 교차되며 나오면서 계속 시청자로 하여금 카메라를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픽션 안에 또 다른 픽션을 둠으로서 상대적으로 시청자와 더 가까운 픽션에 좀더 이입하기 쉽게 되는 것이다. 이는 80년대의 영화는 동시녹음이 아니라 후시녹음으로 만들어졌다는 장치를 가져 오며 더 극대화된다. 대본에는 없던 대사들도 만들어서 입혀지고, 특히 희란의 후시녹음 목소리는 이하늬의 목소리랑 꽤나 다르게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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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는 80년대 영화 현장이 어땠는지를 보여준다. 지금이라면 배우들이 대부분 소속사가 있고, 그 소속사에서 영화사와 계약을 중개한다. 하지만 <애마>에서 보면 아예 영화사가 배우와 전속 계약을 맺고, 거기서 착취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미 정점에 선 정희란(이하늬 배우 분)은 이제 더이상 무조건 벗는 역할을 맡기 싫다. 애마부인의 주연을 거부하자 신성영화사 대표 구중호(진선규 배우 분)은 신인을 찾고 동시에 희란의 배역을 최악의 캐릭터로 그려 그녀의 커리어를 박살내버리려고 한다. 새로운 애마부인의 주인공으로는 밤무대에서 탭댄스를 추던 신주애(방효린 배우 분)가 캐스팅된다. 애마부인의 감독 곽인우(조현철 배우 분)은 입봉작인 애마부인을 단순 에로가 아닌 자신의 예술관을 담은 영화로 만들고 싶어하는 감독으로, 능글맞은 구중호와 대비되게 사회적으로 약간 어설픈 예술가적 기질을 풍기는 인물이다. 희란은 애마부인이 엎어지길 바라고 주애를 견제한다. 그러다 이 영화가 우여곡절을 겪고 개봉하고, 그 이후의 일까지를 6부작으로 그린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하늬의 연기이다. 희란이라는 역할과 이하늬가 너무 잘 어울린다. 우리가 '서울 사투리'라고 부르는 말투와 당시 배우들의 연기톤을 재현하는데 이하늬 배우의 간드러진 목소리와 정말 잘 어울린다. 당시의 말투와 발성들을 보고 있는 것이 신기하고 재밌다. 또한 희란이라는 배역이 극중 가장 입체적이다. 조금은 갑작스럽게 돌변하는 측면이 없잖아 있지만, 당시 영화계의 문제들이 계속 누적되다가 마지막 하나의 트리거가 그녀를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는 있다. (조금 더 잘 연계성을 만들어 줬다면 더 좋을 뻔했지만. 그건 좀 아쉽다.) 그리고 방효린 배우의 연기도 좋았다. 순진하고 순수한 듯 보이면서도 절대 무르지 않고 심지가 굳은 느낌을 잘 연기했다 생각한다. 탭댄스 씬은 진짜 헉 하면서 봤다. 매력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곽인우의 캐릭터도 나는 꽤나 재밌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감독의 모습은 촬영 현장을 진두지휘하면서 모든 것이 머릿속에 계산되어 있고, 사람들을 컨트롤하는데 달인일 것만 같은 그런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근데 곽인우는 구중호같이 능글거리고 뻔뻔하지도 않고, 희란처럼 카리스마 넘치지도 않고,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해서 관철시키는 편도 아니며 편집권을 결국 뺏기면서도 그래도 내 작품이라고 타협하는 부분도 보인다. 그런 모습이 내가 상상하던 감독의 모습과 많이 달라서 재미있었다. 그리고 감독이 희란에게 '선배'라고 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영화계라고 묶이는 내부에서는 배우이든 감독이든 먼저 일을 시작하면 선배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구나, 하고 엿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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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는 정말 재밌게 시작했지만, 뒤로 갈수록 조금 아쉽다. 사건이 너무 많고 에피소드는 너무 적다. 이 시리즈를 요약하라고 하면 너무 오래걸린다. 사건이 넘치게 많기 때문이다. 사건이 너무 많고 시간이 부족하면 당연히 내용에 비약이 생길 수밖에 없고, 시청자를 납득시킬 설득력이 떨어지게 된다. 그게 조금 아쉽다. 한 2화정도 더 길게 가져가고, 감정선을 좀더 촘촘히 잡았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영화계 단편을 보여주다 어느순간 누와르가 된 기분이 든다. 워낙 숏폼에 익숙해진 시청자를 고려해 일부러 더 사건을 때려넣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만, 나는 조금 덜어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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