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필사 #17]
19세기의 비 - 이장욱

영원한 음악 따위가 흐르지 않도록

by 변민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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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전언과 최량의 음악이 만나는 경지가 시의 낙원이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최량의 음악을 최상의 전언과 바꿀 생각이 없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p.223)




음악에 대하여.


위 시에서 황병승의 "나는 선언의 천재"(「사성장군 협주곡」)와 같은 자아에 관한 '뚜렷한' 전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느낌의 전언이라고는 "나는 변신을 사랑하는 마법사"정도다. 오히려 이 시는 전언으로 구성된 시보다는 어떤 사람이 흥얼거리는 노래에 가깝다. 화자는 단지 자신이 좋고 싫어하는 대상을 노래한다. 예를 들면 "오늘은 순교자들이 싫어져" "그런 마법을 아는 중세의 여자를 만나고 싶네"가 그 노래의 가사다.


일반적으로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자아가 강조되기 마련이지만 이 시에서는 오히려 흐릿하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썼던 "나는 변신을 사랑하는 마법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에서 나는 자꾸만 변주되는 대상에 매력을 느낀다. 나는 "미친 듯이 변신 중이고 사라진 빗방울을 찾아 헤매"고 있으며 만나고 싶은 여자가 부리는 마법도 "골목 모퉁이를 돌면 또 모든 게 새로워지는" 마법이다.


마법에 이어서 시 속에서 "안락사"라는 이미지가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단계에서 죽음으로의 "변신"이라면, "아홉 시 뉴스의 순교자"들은 대중을 향해서 영원을 설파하는 이미지가 그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과 햇빛을 위"한 안락사를 허용해달라는 요청은 자연스럽다. 반면, "아홉 시 뉴스의 순교자"들을 싫어하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자신이 흥얼거리면서도 "영원한 음악 따위가 흐르지 않도록" 변신 중이다.


그렇다면 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유일한 목요일에는 또/19세기의 비가 내리면"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가? 시 속에서 자칫 뜬금없기도 한 "유일한"과 "19세기의"란 시어는 무력하다. 특히 "유일한"에 대해서는 시인은 오히려 무력함을 의도하고자 시 속에서 목요일을 반복적으로 사용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앞선 흥얼거림에 비해 자칫하면 무거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목요일'과 '19세기의 비'는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클라이맥스나 화려한 엔딩보다는 아무렇지 않은 끝부분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 전체를 읽어보면 미묘하게 서정적이다. 그러나 화자는 힘을 주거나 어떤 대상에 서정성을 투영하기보다는 아무렇지 않게 노래할 뿐이다. 이러한 아무렇지 않음이 미묘한 서정성을 낳는다. 또한 이러한 지점들은 화자로부터 독립한 서정성이며 아름다움이다. 서정의 본디 뜻은 "자기의 감정이나 정서를 그려"내는 행위이다. 하지만 이런 서정은 오히려 나르시시즘을 느끼는 자아와 결별을 하고 스스로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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