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필사 #19] 비정성시(非情聖市) - 김경주

전율하는 문장들

by 변민욱


1.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위에 필사한 구절은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문학과 지성사. 2006)에 있는 비정성시의 일부다. 정말 일부 중에서도 일부다. 필사는 엄두가 안 나서 타이핑을 해보면 12쪽이 넘게 나온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라는 선언에 어울리는 선언문답다.

우연하게 이 시집을 서가에서 꺼냈을 때 나는 운명론자가 되었다. 아마 운명이란 운명론자가 입는 우연이란 씨실과 인연이라는 날실이 직조(織造)한 옷일 것이다. 수업시간에 우연히 본 시 한 편에 이끌려서 서평을 적는 과제에 덜컥 이 시집을 골랐다. 읽고자 앉은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었고 이어지는 감탄은 탄복이 됐다. 이후로 글을 한동안 못썼더랬다. 그래서 이 시집을 가장 멀리 떠날 지인에게 선물로 드렸다.


나는 전생에 사람이 아니라 음악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은 그때 나를 작곡한 그 남자다 그는 현세에 음악으로 환생한 것이다 까닭에 나는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전생을 거듭 살고 있는 것이며 나의 현생은 전생과 같다 나는 다시 서서히 음악이 되어가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간직한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음악이다. 전생에는 음악이었으며 지금은 "그때 나를 작곡한 그 남자"를 들으며 음악이 되어간다. 철학적 배경으론 그의 시집 속 다른 시 「테레민을 위한 단 하나의 시놉시스」에서도 나오는 칸트의 후생 철학이다. 그는 음악을 통해서 전생과 현생 그리고 후생까지 노래한다. 그래서 그는 죽음은 "서서히 말라"가는 노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또한 "서서히 음악이 되어간"다.


모든 나를 인정하는 순간이 올까? 목이 마르다고, 당신과 함께 사는 동안 여덟 번 말했다


"음악 또한 예감이다"라고 노래하는 다음 연에 이어지는 위의 전언은 묵직하다. 그의 악보가 연주하는 알듯 말듯한 음악을 따라오다가 "모든 나를 인정하는 순간이 올까"라는 문장을 읽으면 아찔해진다. 데카르트가 회의 끝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문장을 낳았다면 김경주는 그 "나"조차 의심한다. 내가 내 안의 모든 나를 인정하는 순간을 마주할 수 있을까? 나아게는 그 질문의 그림자보다 죽음의 그림자가 더 짧다. 시인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일까. 뒤의 "목이 마르다고, 당신과 함께 사는 동안 여덟 번 말했다"라는 난해할 수도 있는 문장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나를 견딜 수 있게 하는 것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한다 그것들을 이해하지 않기 위해 나에게 살고 있는 시간은 무간(無間)이다라고 불러본다 내가 살았던 시간은 아무도 맛본 적 없는 밀주(密酒)였다 나는 그 시간의 이름으로 쉽게 취했다


시 곳곳에 태풍의 눈이 보인다. 시인은 그곳에서 고요하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독자들을 집어삼킨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나를 견딜 수 있게 하는 것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한다." 매일 느끼는 감정 아닌가. 그러나 시는 그러한 당연한 구절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당연함을 다시 보게 한다. 앞선 문장에 "것" 대신에 당신이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집어넣어보라. 무간은 '서로 허물없이 가까움'이라는 뜻이고 불교에서는 '무간지옥'이라는 말이 있다. 살고 있는 시간은 무간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아무도 맛본 적 없는 나만의 밀주다. 그는 이 시간에 의해 쉽게 취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전언이 이어진다.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




2.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


모든 사진 속에는 그 사람이 살던 시절의 공기가 고여 있다 따뜻한 말속에 따뜻한 곰팡이가 피어 있듯이 모든 영정 속에 흐르는 표정은 그 사람이 지금 숨 쉬고 있는 공기다 영정을 보면서 무엇인가 아득한 기분을 느낀다면 내가 그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이곳을 느끼고, 기억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쪽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나의 영정엔 어떤 공기가 흐를까?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붉은 공기가 된다


음악은 이제 레퀴엠으로 서서히 변주되어 간다. 그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노래한다. "사진 속"에 있는 "그 사람이 살던 시절의 공기"나 "따뜻한 말속에" 있는 곰팡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시선은 영정을 마주한다.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를 봤을 때의 시차(時差)를 그는 이 연에서 적어 내려간다. 그리고 그런 기분을 느끼는 이유는 "내가 그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이곳을 느끼고, 기억해내기 위해" "애쓰는" 까닭이다. 음악은 타인의 전생과 현생까지도 흘러들어간다. 또한 음악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음악은 단순한 음악이기보다는 에테르에 가깝다. 이렇게 잠시 아득해지려 할 때 시인은 다시 나를 움켜쥔다. "나의 영정엔 어떤 건기가 흐를까?" 이런 완급조절이 독자를 빨아들인다. 독자는 다음과 같은 시인의 예감을 마주한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너무 많은 죽음이 필요했기에 당신조차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으로 나는 걸어가고 있다


너와 내가 뜨겁게 안는 순간 문득 우리가 죽는다면 몇천 년이 지나 우리는 화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박물관에서 신기하다는 듯이 우리를 만질 것이다 거칠고 딱딱한 질감에는 슬픔이 담기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분노다 나는 비로소 천 년이 지나 사람들이 우리를 만질 때 돌 밖으로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의 야만이다

기억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


타자성에 대한 예감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폼페이 유적을 떠올리며 이 연을 읽었다. 어머니를 아기를 품에 안고 연인은 서로를 안으며 그들은 굳어갔다. 그렇게 화석(花石)이 화석(化石)화 되어간다. 그 사이 눈물은 증발한다. 우리는 유적을 볼 때 신기한 듯 쳐다본다. 만져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 흘렸던 눈물과 그들이 마주했던 재앙적인 풍경의 질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 앞에서 내뱉은 탄성과 느기는 경이는 야만의 이명이 아닌가. 그래서 타자성은 분노로 표출된다. 시인은 어법도 그러하지만 이 땅에서 몇 천년은 산 것처럼 보인다. 이어지는 "비로소"라는 단어가 살아 움직인다. 그럴 때 "기억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 기억은 세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빛의 속도를 능가할 수 있다.


수음을 하는 동안 몇천 년 나는 늙어간다
수음을 하는 동안 나는 나라는 문명이 슬프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란 한 번 자살하는 것과 같다 익숙했던 모든 것들과 생이별하는 것이다 저승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곳의 모든 것이 내가 사랑하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낯선 곳에서 잠을 잘 자지 못한다 낯선 곳에서 자는 일이란 저승에서의 하룻밤과 같다 사람은 그 사람이 살아온 생에 다름 아니므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란 내가 한 번 자살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칸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다가올 때가 있다


사족을 붙이고 싶지 않은 연이다. 가장 좋아하는 연은 아니지만 가장 와닿는 연이므로. 김경주의 어법은 잠언이지만 그의 노래는 감각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너무 쉽게 "감각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라는 표현을 썼는지도 모른다. 그는 꿈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저 자신의 내면을 도굴하는 것이 꿈이라면 사람들은 꿈이라는 실형을 살고 있는 셈이다 위험한 것인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곳을 다녀올 때마다 다른 비석(飛石)을 세우고 온다 그리고 거기서 데려온 기억의 비문을 문득 추억이라 부른다" 이런 문장을 마주하면 도무지 풀어낼 재간이 없다. 그냥 이것을 꿈이라고 추억이라고 부르며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시인은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지치지도 않고 다음과 같은 문장을 쏟아 낸다. 그가 말하듯"내게서 꿈이라는 혐의를 빼면 대체로 나는 무죄가"며 단지 "그는 절박했을 뿐이다."


기억이란 인간의 두 번째 생이다 인간은 기억을 기다릴 뿐 기억을 소유할 수 없다 모든 기억은 불구이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절박하게 부패해가는 생의 오류만을 시라고 불렀다


한 번도 꽝꽝 언 하늘에 연(鳶)을 날려보지 않은 사람과는 나는 놀지 않는다. 찬송가를 백 곡 이상 안다고 하는 사람과는 나는 노래 부르지 않았다 부모의 주민등록번호를 줄줄이 암기한다는 사람과는 돈거래하지 않는다
그는 내게 불효를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릴케의 뜨거운 서시(序詩)를 앞에 놓고 자위를 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은 그대라는 성(城) 안으로 들어가 평생 시만 쓰며 살겠다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 번도 나는 그런 사람을 살아보지 못했다.



“릴케의 뜨거운 서시를 앞에 놓고 자위를 해본 적 있는 사람”과 같은 표현은 참신하다는 표현을 넘어 부담스럽다. 이 부담이 우리에게 사유를 강제한다. 자위란 무엇인가. 두 눈을 감아 쾌락이라는 환상적 착란의 형식 속에서 그 대상을 욕망하면서도 내용으로선 두 눈을 뜨면 그 대상의 처절한 부재를 느끼는 것이다. 또한 재확인한 부재의 경험 통해 대상에게 결코 다가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음을 주체는 깨닫는다. 그것이 자위고 곧 삶이다.


또한 그러한 타자의 고통을 느껴본 적 있는 사람만이 시인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그대라는 성(城) 안으로 들어가 평생 시만 쓰며 살겠다는 것”의 의미는 당신이라는 폐쇄적 세계에 들어가 그곳에서 틀어박힌 체 당신 속에서 시를 쓰겠다는 것이다. 즉 타자를 은유함으로써 멀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감각을 전달하고자 하면 그는 가까워져야 한다. 이 역설이 그가 느끼는 처절한 타자성이다.



내가 아는 한 칸은 자신이 사랑하는 한 여자를 살리기 위해 소설에 주술을 걸어 그녀를 구할 것이라고 했다 칸은 매일 비명처럼 살아갔다 우리는 절박하게 부패해가는 생의 오류만을 시라고 불렀다 칸의 파오를 찾아가지 못한 지 오래다 나는 칸과 자고 일어날 때마다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적이 몇 번 있었다 우리에게 생을 증거 하는 것은 고통뿐이었지만 우리의 면죄부가 고통 그 자체일 순 없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우리는 근사한 기분이었다 칸과 나는 자웅동체처럼 웅크리고 자는 습관이 있다 배춧잎 같은 이불 위헤서 깨어나면 그와 나는 SAM이 된다 현실은 죄지은 것도 없이 우리가 매일 써야 하는 삶의 조서다 우리는 붙어서 걸었고 매일 고개를 숙이고 조서를 썼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죄짓는 기분이다


위에 필사한 구절이 드디어 나온다. 패스포트에서의 감각에도 놀랐지만 그 감각을 "한 여자를 살리기 위해 소설에 주술을 걸어 그녀를 구할 것"이라고 말한 구절에서는 탄복할 수밖에 없다. 그 처절한 고통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낳는다. "우리는 절박하게 부패해가는 생의 오류만을 시라고 불렀다." 좋은 문장들을 나누기는 죄송스럽지만 그럼에도 나누자면 두 가지 정도가 있다. 반응으로 나눠보자면 첫째는 "나도 저런 생각을 했는데 이 사람이 이렇게 먼저 적었구나"라는 구절이 하나요. "......."이 둘이다. 전자가 질투의 감정이라면 후자는 경외의 감정이다. 또한 여타 시인이 아니라 앞선 문장들과 사유로 시를 빚어왔던 그가 말했기 때문에 이 전언은 묵직하다. 이 문장을 보고 나는 한동안 글을 적지 못했다.


그러나 여운에서 빠져나온 뒤에는 다음 구절이 보인다. "우리에게 생을 증거하는 것은 고통뿐이었지만 우리의 면죄부가 고통 그 자체일 수 없었다." 시인이 이렇게 말하고 근사한 기분을 느끼는 이유는 이것이 그의 삶을 성공적으로 압축한 문장이기 때문이다. 이후에 그는 감각으로 이야기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들이다. 그러나 그게 당연하다. 우리는 이 시인이 말했던 감각의 깊이에 이르러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박에 이해하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그러나 머리에 담아두면 어느 순간 그 문장이 이해되는 순간을 삶에서 마주한다. 시인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면서 끝내려고 한다. "난생처음 나는 나의 울음을 타인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


시인은 신이 놓쳐버린 포로다 그러나 포로는 늘 프로다
내가 가진 유일한 능력은 너와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졌다! 라고 쓰는 것은
단지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곳에 산다
그것이 너한텐 꽤 중요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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