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과 상처

난해함이라는 문법.「비둘기 페트라 」

by 변민욱



비둘기는 전혀 평화로운 동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상징이라는 비둘기의 역할은 잘못 주어진 것이다. ‘인디언의 고문 말뚝을 제외하고 비둘기처럼 동족을 서서히 끔찍하게 죽도록 잔혹한 상처를 입히는 동물은 또 찾아보기 힘들다.’ 비투스 드뢰셔는 콘라트 로렌츠의 실험을 그에 대한 예로 제시하고 있다. 비둘기들은 두 마리 이상을 한 새장 안에 가둘 경우 상대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서로를 쪼아댄다.


「상식의 오류사전」(p.167)




1. 난해함과 환상


최근에 시를 적으면서 돌이켜보며 한 가지 습관을 발견했다. 시를 쓰다 보면 한계에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특히 시 속에서 이미지들을 배열할 때가 그렇다. 이럴 때 자주 환상 속으로 도피한다.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안일함이 빚어낸 '환상'을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난해함'의 어조로 그려낸다. 이런 '환상'과 '난해함'이란 한 쌍은 도피이자 포기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바로 보자. 난해 함이라고 해서 다 같은 난해함이 아니다. 미숙해서 난해한 시들의 사기에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된다. 어떤 시들에서 난해함 도피이지만 또 어떤 시들에서는 그 난해함을 밀고 나가서 새로운 곳에 다다른다. 또한 시를 너무 관념적으로 바라봐서도 안된다. 관념을 그려내기 위한 이미지도 있지만 이러한 이미지들은 의도가 이미지를 앞지르기 쉽다. 반면 '이미지만을 위한 이미지' 혹은 '이미지 그 자체'로도 생명력을 보유한 이미지들이 있다.


이민하는 「비둘기 페트라 」(『음악처럼 스캔들처럼』)가 실린 시집 중「문제작」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나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동등한 닉네임이다." "복잡하거나 어려운 건 없습니다. 손가락은 지시가 아니라 암시입니다." 앞선 글에서도 봤듯이 시 속에서 "나"는 특정한 혹은 특별한 자아가 아니다. "너를 ~라고 부를래"와 같은 어법처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동등한 닉네임"일뿐이다. 우리는 "동등한"과 "닉네임"에 동등한 무게로 방점을 찍을 필요가 있다.


두 번째 문장인 "손가락은 지시가 아니라 암시입니다"를 살펴보자. 지시는 어떤 대상을 가리킨다. 즉 자아가 이미 그 물체를 지각한 상태에서 타자에게 그 대상을 지시한다. 그러나 암시는 무수한 의미로 읽힐 수 있다. 지시는 그 대상을 현시하지 못하면 곧바로 실패로 귀결되지만 암시는 그 실패마저 성공으로 다다를 수 있는 무한한 길이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인은 "당신은 한층 가벼워져야 하리"라 충고를 건넨다.







2. 질문의 방향

이제 새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비둘기 페트라 」의 'Pigeon's milk'를 보면 유독 상처에 대한 시어가 많다. 아이인 듯 보이는 화자가 할아버지에게 "피를 확인해봐요" "긁힌 상처가 있는지" "귀를 찢어 상처의 문신을 새긴 아이들"과 같은 시어다. 시인은 시 속에서 유년시절의 상처를 은유한다.


또한 그 상처는 "고무 점토로 번식하는 종족만 남았는걸"이나 "잿빛 유니폼을 아이들"아 "일렬"로 들어가는 장면과 "숲 길마다 철로 건설"과 같은 시구를 보았을 때 억압과 획일성으로의 동화로 인해 비롯되었다. 그리고 잠시 이 비둘기 페트라의 배경이 된 실험을 보자. 동물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비투스 드뢰셔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적 있었다. "인디언의 고문 말뚝을 제외하고 비둘기처럼 동족을 서서히 끔찍하게 죽도록 잔혹한 상처를 입히는 동물은 또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봐야 하는 건 혹은 겪고 있는 것은 비둘기의 잔인함인가 혹은 이 실험을 설계한 로렌츠의 잔혹함인가?


이러한 세계 속에서 페트라는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밖은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숲 밖에는 "고무 점토로 번식하는 종족만 남았"으며 천사 엄마는 "초코파이와 검은 안대"를 나눠주며 기차에 치인 뒤에는 자신 또한 고무 점토에 휘감긴다. 그러나 페트라는 포기하지 않는다. 마지막 점토를 긁어내고 거추장스러운 날개깃도 덜어내자 또 다른 "가벼운"지점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곳마저 또 다른 한계(새장)이었을 뿐이다. 잔혹한 헝거게임이 새장 속에서 벌어진다.


그곳에서 "페트라와 윌리는 유일한 모이인 사랑을 나누"며 "머리에서 꼬리까지 다정하게 서로의 깃털을 뽑아준다." 실험 분위기와 정반대인 "사랑"과 "다정"을 제시한다. 그러나 섬뜩한 것은 이 연의 마지막 문장이다. "우리는 지루한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이건 장난일 뿐이야"라는 문장은 천진난만함 속에서 잔혹함을 품어낸다. 이윽고 이 잔혹함이 부화했을 때 이는 나의 잘못도 아닐뿐더러 너의 잘못도 아닌, 그저 본능에 이끌린 생존이었음을 처절하게 이야기한다.


이 경험을 겪고 난 후에 페트라는 이야기 너머의 숲은 "진공관"처럼 바라본다. 그녀가 바라본 세계에서 우리는 "공기펌프의 들숨과 날숨처럼 무병장수"하고 있다. 진공관의 이미지에 더해, 무병은 장수로 귀결될 수 있는가. 그녀의 시에서는 누구도 아프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누구도 살아있지 않다. '난해하다고 할 수 있는' 페트라의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고무 사냥꾼들은 "유일한 장난감인 몸속의 철삿대"를 떨 뿐이다. 그들은 "꿈뻑꿈뻑"하며 "구름에 엽총을 겨눈다."


이 글 초반부에 다루었던 질문으로 돌아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트라는 왜 이 난해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고 난해하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물론 난해할 지라도 그것은 페트라를 탓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페트라를 새장 속에 가두는 로렌츠라는 "지시가 아닌 암시"인 존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페트라에게는 이 장난처럼 보이는 이야기는 필사적이다. 시의 마지막으로 이유를 설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우린 지루한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이건 이야기일 뿐이야.
이야기가 끝난 순간, 페트라는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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