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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빨래를 해야지

오랜만에 올리는 시

by 변민욱

런-더리-데이(Run-Dirty-Day)

오늘은 빨래를 해야지.

얼룩을 지워내야지


당신은 오늘도 엎어진 밥상에서 깨진 밥그릇을 줍고 있겠지. 쨍그랑 소리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라는 소린 줄 알겠지. 한창 클 때니까요. 배가 고파서 부엌으로 가서 남은 반찬에 유리조각을 곁들여 식사를 마치겠지. 숨을 죽여가며 편식이 늘겠지. 밤에는 어머니와 인형에 눈을 붙였지. 몰래 두 개를 훔쳐서 눈이 없던 내 곰인형에 붙였지. 우리는 함께 누워서 야광별로 별자리를 그렸지. 그거 알아? 별자리들 중에는 해피엔딩은 없대. 우린 별이 되겠다. 하하하.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간다던데.

웃음은 불행의 복선이 된다는 걸 알게 되겠지.


엄마 제발 나와 함께 천국에 가자고 기도하지 마. 아무리 비가 와도 젖은 베개는 다시 젖지 않겠지. 어른들도 싸우면서 크는 건가 봐. 친정으로 간 어머니는 내년에 오시겠지. 구겨진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2004년 12월 20일 맑음. 놀았다. 재미있었다. 행복했다. 즐거웠다.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매일 일기를 쓰면서 다짐이 늘었지. 거짓말이 늘었지. 책상 위에 놓인 주사위를 놀이처럼 던졌지 육이 나와 게임을 끝내고 싶지만 일이 나오겠지. 일 밖에 없는 주사위를 던졌지.


빨래는 매달려 있어서 날아가지 못하지

날아가지 못해서 매달려 있겠지


아버지의 걱정이 나를 잘못 버릇 들였지. 그에게 집안에 그릇이 다 깨지기 전 베개 밑에 숨겨두었던 인형을 보여줘야지. 보여줘야지. 이것은 상처와 상처가 마주 잡는 최소의 악수. 내일은 집안이 집 밖이 되어버린 다섯 천사들의 이름을 알게 되겠지. 왜 떨어지는 꿈을 꾸면 자꾸만 뛰어오르며 잠에서 깰까. 아이는 키가 자라고 천사들의 손에서는 손가락이 자라나겠지.


얼룩이 지워지며 번져가도.

오늘은 빨래를 해야지.




최근에 좋아하는 평론가님의 새 책이 나와서 문장을 옮겨 적어보려 한다.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하리라. (신형철,『슬픔을 공부하는 슬픔』p.43)


어린아이를 화자로 사용하는 경우에 자기 연민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귀결이다. 그래서 시는 거기서 더 나아가길 작가에게 요구한다. 어려운 일이다. 늘 머릿속에서는 그럴듯해 보이는 문장을 글로 옮겨보면 초라하다. 그래도 나아간 거리만큼만이 쓸 수 있는 깊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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