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왜 문학을 하냐는 질문에 대한 23살의 답
제게 당신은 오르페우스처럼 다가왔습니다. 당신은 이 시집에서 애도하는 죽음은 하나이자 둘이며, 둘이자 하나처럼 보입니다. 우선 아버지의 죽음입니다. "그는 내가 미리 남긴 유언이다"로 끝나는 「반생」는 가슴이 먹먹하다는 표현이 참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당신의 유언에 사족을 붙이는 행위는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위의 표현을 하게 하는 시를 밑에 한 편 더 적어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는 이 아이들이 누군지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한 복수형이 아니라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그들을 너무 종종 잊는 듯싶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어느 날 한순간에 흠뻑 젖어버린 아이들의 손을" 우리가 "미끄러운 물고기처럼 놓치고 맙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이에 더해 "아이들이 두고 간 소금가마니 같은 시간을, 당나귀처럼 우리는 지고 갑니다"라고 노래합니다.
그 아이들을 만난 이후에 우리는 달라졌습니다. 사실 완료형 어미보다는 달라져야 했다가 더 맞는 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 고백을 해보자면 나는 오늘 처음 만났지만 당신을 오래 좋아할 것 같습니다. 바로 시집에서 반복되는 "미안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이 사과를 하는 행위를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 사과를 하는 행위는 우리에게 당위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합니다.
그렇지만 조심히 적고 말해야 합니다. 저는"아이들"과 관련되지 않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잊고 사는 단어는 미안해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미리 사과"하며 "아이가 온 먼 공동체의 일들이 잊히기 전에 물어보려"합니다. 당신의 우주는 "죽은 새들이 미처 다 날지 못한 거리만큼" 팽창하며 그만큼 하늘은 둥글고 높아집니다.
시의 후반부에서 서술어들이 쉬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떠나고" 이에 부사를 보태서 "서둘러 떠난 것입니다"와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에서 나는 여태껏 너무 쉬운 시들을 써왔는지 반성해야 했습니다. 반성을 할 권리가 있는지 먼저 물어야 했습니다. 누군가 이런 시를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라고 하겠지만 저는 순수문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추석이면 친척들이 서로의 아이들에게 무얼 하는지 정확히는 무엇을 하며 먹고살고 있으며 계획인지를 물어봅니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고 이야기하겠지요. 글을 쓰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강박증적으로 달고 삽니다. '나는 왜 읽고 쓰는가?'라는 질문입니다. 2010년 즈음을 전후로 한국의 시에서 또 다른 줄기가 생겨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우리'라는 단어에 대한, 공동체에 대한 질문을 하는 줄기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서도 오늘 한 가지 정답은 아니어도 해답을 듣고 갑니다. 문학은 가장 처음 울지 않더라도, 가장 나중까지 많이 운다고. 그래서 문학은 낭만적인 것도 아니며 밥벌이가 되는 것도 아니지만 반드시 필요하다고. 당신과 같은 작가들이 나는 개인적으로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이 시 바로 앞에 나왔었고 방심하고 읽었다가 내가 무너져버린 「매일 무너지려는 세상」의 구절을 지나치지 못해 적으면서 글을 맺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엄마들은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순간 한순간에 세상이 무너질까 봐
그 자리에 곧바로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는다.
지구가 땅속 깊은 곳에부터 폭발해 터져나오려는
그 순간 그 자리를 틀어막듯 주저앉는다.
단 한 걸음도 더 내딛지 못할 순간이 왔다.
단 한바울도 남김없이 온 힘이 빠져나간 순간이 왔다.
이제 어떡하나, 엄마들 가슴 한가운데 난 구멍을.
당장 막지 않으면 금세 금 가고 갈라져 댐이 툭 터지듯
한 순간 무너져내릴 텐데, 세상이 엄마로 다 잠길 텐데.
세상 모든 사람들 물상에 무릎이 부러지고
막지 못한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온몸이 줄줄 다 흘러나올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