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작별」 & 혁오의 「Tomboy」
현수는 어떤 인물인가? "그녀가 일했던 마지막 직장에서 현수 씨는 그녀의 팀에 들어와 잠시 일했던 인턴이었다. 나이나 경력으로 보면 정규직으로 뽑아야 할 사람이었지만 사장은 일단 일하는 것을 보자며 그를 인턴으로"채용한다. 그렇다. 현수는 곧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이다. 현수가 다녔던 회사 역시 "정규직 직원은 그녀를 포함해 셋뿐이었고, 나머지 인력은 인턴사원과 실습생들"로 충원된 회사다. 실습생들은 "여름과 겨울 방학 때 현장실습을 나왔다가 휴학하고 한 학기나 일 년씩 더 일하는 대학생"들이었으며 "수당은 물론 점심 값도 지급받지 못했지만 잦은 야근과 주말 특근에 군말 없이 동참"한다.
이것은 소설인가. 이 물음은 중요하지만 우리는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다. 이것은 소설 속의 세계이며 동시에 허구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거짓이고 허구인가?'라는 물음에는 쉽사리 '그렇다'라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우리가 사는 일상의 단면을 잘 도려내어 세계의 현실성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N포 세대는 이제 너무나 흔한 말이 되었다. 허탈한 이야기 뒤로는 씁쓸한 자조가 이어진다.
"신입 사원 0명 모집은 정말 0명을 모집해서 저렇게 적나 봅니다." "이제는 인턴이 아니라 금턴이죠." 앞선 이야기들은 더 이상 낯선 이야기나 농담이 아니다. 한강의 「작별」 속의 세계는 특별한 설정이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현실 속 일상의 세계은 서사가 확보될 정도로 입체적이고 충분하다. 이런점에서는 오히려 현대 사회의 일상은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다.
그들은 어느 날 발매된 'TOMBOY'를 들었을 때 다음과 같은 가사에 공감을 했을 것이다. "난 지금 행복해 그래서 불안해/폭풍 전 바다는 늘 고요하니까" 요즘 주위의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행복하면서도 불안해한다. 이 상태가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행복은 현대사회에서 성실하게 불안했던 사람에게 주어지는 잠깐의 휴식이 되었다. 이것은 비약인가. 아니다 위의 "난 지금 행복해 그래서 불안해"의 "불안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라는 대우 명제로부터 도출된 결과를 묘사한 문장이다.
그들에게 희망은 깨지 않는 악몽 같았다. 이것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계이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비극적 세계를 완성하는 인물은 현수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이다. 그는 "그런 불안과 기대감을 능숙하게 다루"는 인물이다. "이따금씩 정규직 전환에 대한 가능성을 암시하곤 했으며" 그들 역시 "최소한 일 년이라도 버텨야 어디든 지원할 때 이력서에 한 줄을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희망은 깨지 않는 악몽 같았다. 그들은 불안과 피로가 속에 살아가는 세대가 되었다.
결국 현수는 그녀의 짐작대로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소설 속 그녀는 현수를 기억하는 까닭은 "오직 그의 달 치 월급이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술회한다. 임금 지불이 계속해서 미뤄지자 현수는 회사로 찾아온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무릎 위에 책 한 권과 휴대폰을 올려놓았지만 한 차례도 그것들을 펼쳐 읽거나 만지지 않"는다. "마치 수업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허공을 바라보며 바른 자세로 앉아 있"을 뿐이다. 현수는 사장님이 오늘 사무실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그의 자세는 무기력해 보이지만 무기력함 속에서 어떤 저항이 느껴진다.
마침내 사무실에 둘만 남게 되자 그녀가 그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한다. 그는 그녀와 국수를 먹으며 털어놓는다. "이십 분이면 걸어올 수 있어서, 순전히 그것 때문에 지원했던 거예요. 버틸 수 있을 때까지만 버텨볼 생각이었어요. 한두 달 월급이라도 받을 때까지 어쨌든 그럼 조금 더 생존할 수 있을 테니까요" 현수가 그렇게 버텼던 이유는 그에게 한두 달 월급은 생활비가 아니라 생존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수의 '무언의 투쟁'은 깊숙한 곳에서 울림을 준다.
세 차례 더 회사에 찾아온 끝에 그는 월급을 받아낸다. 이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그녀도 퇴사한다. 사장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어려움을 견뎌주면 우리 회사가 고비를 넘길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위와 같은 세계에서 한마음, 우리, 한솥밥과 같은 공동체는 세계로부터 개인의 생존이나 생활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어주기보다는 개인을 가둬 넣는 프레임이자 철창의 역할을 한다.
"학창 시절부터 그녀는 경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는 사람, 특별히 뛰어나진 않으나 실수를 하지 않으며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평범하며 성실한 인물이었다. 나이가 이제는 어느 정도 있어서 당장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실업급여가 어느 정도 들어올 것이며, 서울에서 외각으로 이사를 한다면 전세 차액으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 그러나 "다만 자신의 삶에 얼마의 시간이 남아 있을지 그녀는 궁금"해한다. 매년 다이어리를 사서 일 년 계획을 세우고 낙관적으로 장기적인 계획도 세운다. 그렇게 하루를 버티고 한 달을 버텨 일 년마다 나이테를 그려나간다.
"예금 잔고와 적금 만기를 계산하고, 아이의 대학 자금을 차질 없이 납부하기 위해 한 해 한 해의 예산을 미리 짜고 연말마다 결산"하더라도 미결로 남는 문제는 "그녀 자신의 노후였다"이런 버티는 삶은 언제까지 지속해야 할 것인가. "언제가 끝인지만 알 수 있다면 이 모든 일이 쉬워질 텐데, 착오 없이 분명해질 텐데, 깨끗해질 텐데" 돌이켜보면 나이테를 조차 선명하게 그리기 힘든 삶이었지만 앞으로도 막막하다. 언제까지 이런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이런 삶 속에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절망하는 그들의 귀에 이어지는 구절은 "우리 사랑을 응원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