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이다. 지구가 의심을 시작해버렸다.
역사와 전쟁
지구는 우주를 믿을 수 없었다
우주를 보려면 우주보다 커지거나
우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화장실에서 X가 본 낙서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왜 한 달에 한 번식 엘리베이터에 갇히죠? 갇히는 사람이 왜 하필 당신이죠?>
우주의 입장에서 지구는
맞추어지지 못한 채
침대 아래 굴러다니는
잃어버리는 큐브였고
지구는 돌았다
열심히
열심히
제 몸뚱어리를
돌렸다
끊임없이 현실을 조달받아야 했다
-문보영, 『책 기둥』 중에서
- 이상한 나라의 집합론 -
재미있는 발상이다. 물론 이와 같은 경험을 겪고 있는 "당신"과 "지구"에게는 끔찍하겠지만 말이다. 이것은 "한 달에 한 번씩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누군가 개인적 경험에서 뻗어나간 시인 것처럼 보인다. 첫 연에서 몇십 억년을 잠자코 돌고(Spin) 있는 지구가 돌연 우주에게 말을 건다. "저는 당신을 믿을 수가 없는데요?" 지구에게 우주란 수학용어를 빌려보자면 자신을 포함하는 무한 집합이자, 철학에 기대어 말을 해보자면 대타자가 아닌가. 그는 자신을 포함하고 있는 집합과 대타자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우주를 보려면 우주보다 커지거나/ 우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역시 억 겹의 세월 동안 품어왔던 질문이라서 그런지 날카롭다. 원론적으로 어떤 대상을 완전히 지각하려면 그 대상보다 커야 한다. 당신이 개미가 되어 인간을 바라보거나 혹은 그 반대로 인간의 입장에서 개미를 바라본다고 가정해보면 될 것 같다. 실상 우주에 비해 지구의 크기는 그것보다도 훨씬 작을 테니까. 그와 동시에 그 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달을 바라볼 수 있는 것 또한 그 달이 충분히 멀리 있기 때문이지. 만약 이 노트북과 나 사이의 거리에 달이 있다면 나는 달을 완전히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시는 행과 연 사이 '과학적으로 옳음'이나 '서사적 연관성'에 집중하기보다는 단순하게 그러나 깊게 "왜?"를 자문하면서 읽어가는 것이 우리 더 좋은 독법일 듯하다. 왜 지구는 돌고 있었고, 돌고 있으며, 돌고 있을 텐데 갑자기 이런 질문을 우주에게 던진 걸까. 질문은 잠시 미뤄두고 다음 문장을 읽어가보도록 하자. 이렇게 의심을 품은 지구에 다음과 같은 낙서가 적혀있다. "당신은 왜 한 달에 한 번씩 엘리베이터에 갇히죠? 갇히는 사람이 왜 하필 당신이죠?" 일단 이 낙서의 목격자는 "X"이기 때문에 당신이었을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다. 만약 지금까지 보지 못했더라면 우리가 그냥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엘리베이터에 한 달에 한 번씩 갇히는 사건은 과학적 인과성은 없지만 어느 정도 가능한 이야기다. 엄청 운이 없다는 가정 하에서 그렇다. 또한 누군가는 단순히 '불운'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이와 같은 사건을 겪을 확률을 계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다음 문장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갇히는 사람이 왜 하필 당신이죠?" 지구는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사람을 보고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쟤는 저렇게 도는데 왜 나는 이렇게 도는 걸까?"에서부터 시작해서 "왜 내가 돌고 있어야 하는 거지?" 이것은 지구가 드디어 깨우침에 다가가려는 일종의 코기토(데카르트)다."나(지구)는 생각한다. 고로..." 근데 "왜 내가 존재해야 되는 거지?" "나는 우주라는 통 속에 갇힌 뇌가 생각하고 있는 모습은 아닐까?"
자기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지구가 본다면 이미 했어도 진작에 했어야 할 의심이다. 사실 "우주의 입장에서 지구는/ 맞추어지지 못한 채/ 침대 아래 굴러다니는/ 잃어버린 큐브"였다. 이는 지구가 우주로부터 불완전함과 동시에 망각된 존재임을 의미한다. 위와 같은 철학자 이전에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했던 (그 당시 기준으로) 미친 과학자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 "지구는 돌았다(Crazy)." 그것도 "열심히/열심히" 돌고 있는 와중에도 지구는 돌고 또 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제 몸뚱어리를/돌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심을 해선 안 된다. 그냥 돌기만 해야 돌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이 탐색하고 추구했던 "진실"을 깨우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현실을 조달받아야 했다"
앞서서 잠깐 스치듯이 대타자 이야기를 했다. 위와 주체가 다른 해석을 통해 읽어 보자. 만약 지구가 인간이고 우주가 신이라면? 앞서서 살펴봤던 시와 유사하게 이는 신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는 시가 된다. 이렇게 대입을 해보면 과학적으로 보였던 2연은 돌연 다음과 같이 심오한 문장이 된다. "신은 보려면 신보다 커지거나/ 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그렇다. 신이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면 우리는 신을 어떻게 보고 믿어야 할까. 보이지 않는 데도 믿어야 할까. 과한 해석일까.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은 어떤가. "신의 입장에서 인간은/ 맞추어지지 못한 채 침대 아래 굴러다니는 잃어버린 큐브였고" 그렇다. 사실 이 시에서 지구는 인간의 질문을 인간 대신 우주를 향해 던지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 속의 지구는 물음을 던지고 의심하는 사람들의 집합이다. 물론 이에 대한 여집합도 존재한다. 미안하지만 이제 그들은 의심을 시작한 지구에게는 "왜 우리는 빵을 받지 못했을까(「입장 모독」)"라는 질문을 품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는 오리털( 「오리털 파카신 」)" 들일뿐이다. 인간들은 의심을 계속해 나가지만 결국 불가해성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보다 집단의 현실 속에 살아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내정된 실패 속에서도 계속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 그런 패배를 마주할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그들은 "돌았다" 지구가 도는 속도와 똑같이 돌아서 다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제 몸뚱어리를 돌렸다." 그렇게 그들도 위에서 지구의 입장에 서서 "끊임없이 현실을 조달받아야 했다."
요즘 신에 대한 '입장모독'을 심하게 하는 것 같아서 더욱 착하게 고운 마음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사실 생산적인 의심은 깊은 불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으나 어떤 면에서는 어떻게든 믿어보려는 사람의 발버둥일 수도 있으니까요. 문보영 시인님 특유의 발랄함 속에는 그래서 그런지 불신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시에 내재된 발랄함에 맞춰서 글도 조금 재밌게 적어보려 하고 있습니다. 어떠신지요...? 글의 후반부에 "*"표시된 부분은 너무 갑자기 비약이 아닐까?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시집 속 다른 시에 이와 비슷한 문장이 있어서 가져와 봤습니다. 또한 형식적인 면에서는 해설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서 필사에서 워드로 바꿨습니다. 오른손이 요즘 무리를 해서 아픈 까닭도 있고요. 아 맞다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늘 감사드립니다. 건강하고 의미 있는 한 해 보내기를 멀리서 바라는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적으며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