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er & sweet?
오늘 당신은 몇 개의 문을 지났나요?
한 지인의 추천으로 국립현대미술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나는 한 작품을 떠올리고 있다. 마크 살바투스의 '대문'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그가 지내고 있는 마닐라 케손시티의 수많은 대문 사진을 보여준다. 문이 열리고 닫히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도록 연출한다. 그렇게 열린 문과 닫힌 문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문의 움직임에 따라서 '나는 당신을 환영합니다.'와 '나는 당신을 환영하지 않습니다'가 머리 속에 교차되었다.
숨이 턱 막히는 나날이다. 방문을 열고 현관문을 열었다. 올 시간이 됐는데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딱 더운 만큼 짜증이 났다. 벌 떼처럼 내리쬐는 햇살. 그 사이에 가득 스며든 습기. 오늘 서울의 온도는 40도까지 올를 예정이라고 했다. 새삼스레 '오늘은 또 왜 이렇게 덥나?' 생각하던 중 버스가 왔고 문이 열렸다. 그 안은 시원했다. 버스에 타자마자 내릴 때 걱정이 들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학교 도서관 문을 열 때까지 얼마나 더울까. 도서관에서 역사관은 또 어떻게 가지. 점심때 역사관에서 식당으로 갈 때는 또 어떻게 하지.라는 사소한 걱정들이었다.
언제부터 문이 생겼을까? 인간이 무언가를 지키고 싶어 하면서부터다. 무언가를 감추고 싶어 하면서부터다. 안락과 경계는 그렇게 어느 순간 동의어가 되었다. 길가의 상가들을 본다. 문의 크기가 들쭉날쭉했다. 문은 건물의 크기에 따라서 커지기도 작아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왜 작은 문도 다 대문이라고 불렀을까?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공사장 인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에게는 문이 없었다. 보고 있던 메모에서 '땀이 비처럼 흘렀다'라는 표현을 필사적으로 지웠다. 그러는 동안 창 밖으로는 과일 파는 아저씨 곁에선 오늘도 파라솔 한 겹이 힘겹게 사투 중이었다. 그에게는 문이 없었다. 그 곁을 지나가는 파지 줍는 할머니 곁엔 한 뼘의 그늘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문이 없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리는 사치를 부렸다. 숨이 턱 막히는 나날이었다.
문은 누구에게나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는 없었다. 이 두문장의 홈 사이로 라디오에서 기상캐스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날따라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명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 때문인지 쓰고 읽고 있던 동화가 너무 밝아 보였다.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열린 결말인지. 닫힌 결말인지. '오래오래'와 '행복하게'사이엔 너무 큰 비약이 있는 건 아닌지. 그 두 단어 중에서 어디에 방점을 찍어서 읽어야 할지 생각했다. 그 고민을 이겨내지 못했는데 해가 져버렸다.
그렇게 해가 지더라도 달이 뜨지 않는 밤이었다.
사족이 되려나. 제목은 'Home, sweet home'이라는 공포게임 제목에서 차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