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스물셋. 내 책의 서문

여든 번째 글을 올리며

by 변민욱



매일의 바람이 다르게 불기 때문에 추억도 다르게 적힌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만은 오로지 나의 전유물 일 수 있다. 한 가지 사건과 실체를 보면서도 너와 나는 다르게 바라본다. 그렇게 시차(視差)를 유발한 거리를 나는 지옥이라고 부른다. 그런 나의 지옥은 누군가의 천국이 될 수도 또 다른 지옥이 될 수도 있다. 이 명제는 역도 참인 명제다. 전자보다 후자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고 이 두 가지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내 눈의 초점과 손목에서 초침은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천국은 하나로 약속될 수 있을지라도 지옥은 그럴 수 없다. 지옥은 사람의 수만큼 많고 또 다양하다. 내가 만나본 사람들은 깊이나 넓이에 상관없이 지옥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앞선 두 문장이 사실임을 우리는 매일 목도한다. 다만 우리가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눈을 감은 당신에게 나는 우리는 천국에서 만날 것입니다와 같은 약속을 하지 않겠다. 다만 내 지옥으로 당신을 초대하겠다. 얕고도 깊은 넓고도 좁은. 그렇게 위에서 언급한 두 문장 속에서 우리는 단 하나뿐인 친구가 된다.



어릴 적 길을 걷다가 반짝거리는 물건들을 보면 주워 담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모은 살면서 반짝거리는 기억을 우리는 양각으로 조각하고 어두운 기억을 음각으로 조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은 종종 멈칫하더라도 흐를 수 있다. 언어라는 비극 속에서 연기하는 사람들은 그 현상을 추억이라고 불렀다. 저기 흘러간 파도에 우리는 거의 죽을 뻔했다. 지금 허우적거리다 겨우 일어났는데 저기 또 다른 파도가 흘러오고 있다. 저 파도는 우리를 죽게 할 파도인가. 아니면 뭍으로 휩쓸어 갈 파도인가.



'흐른다'라는 단어는 일종의 하강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추락은 상승을 향한 맹약이 될 수 있는가. 모든 새는 추락하면서 날아오르는 법을 배운다. 처음으로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를 보면서 나는 희망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그었다. 그렇게 떨어지면서 날아오른 공간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세계가 된다. 그 세계를 만들기 위해선 어설프게 떨어져서는 안 된다. 주저하거나 망설여서도 안된다. 그래서 새는 날고 있지만 원숭이를 조상으로 여기는 인간들은 영원히 걸어 다닌다. 그들은 날개뼈가 종종 뻐근한 이유를 모른다.


날기 위해서는 나날이 가벼워져야 한다. 그리고 날아오른 새들은 결국엔 사라진다. 어릴 적 티베트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풍장을 지내는 모습을 보고 부모님께 나는 죽으면 화장 말고 풍장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어린애가 무슨 그런 말을 하니"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 바람이 유년시절부터 아직까지도 변하지 않는 유일한 장래희망이자 장례희망이다. 어릴 적에는 사월에 피는 목련이 아름다워서 자주 쓰다듬었다. 뭍으로 올라온 뒤에는 줄곧 옆에 함께 운다. 위로의 말은 서로 하지 않는다. 그게 우리 사이 약속이었다. 그날 걸었던 새끼손가락을 사용한 나의 글은 부탁조로 이야기하는 어법을 모른다. 그렇게 내 글은 꿈에서 꿈으로 풍겨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