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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비버 Oct 23. 2024

[뜨카] 꽃다발 뒤의 얼굴

감추지 말아 줬으면 해

시베리아에서 내려오는 찬 공기 덕에 한반도가 꽁꽁 얼어붙었다는 뉴스가 쉬지 않고 들려오는 날에도 어김없이, 지하철역 5번 출구 앞은 약속 상대를 기다리는 제자리걸음들로 가득했다. 지하철을 타러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과 신호를 기다리며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사람들, 큼지막한 카페 간판을 이정표 삼은 사람들이 뒤엉켜 자칫하면 갈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왕복 8차선의 큰 도로를 따라 줄줄이 늘어선 상가들, 그 아래 커다란 '임대' 딱지를 붙여놓은 텅 빈 건물, 그리고 맞은편 인도에 버티고 서서 마치 도로와 인도의 경계를 만드는 긴 떼의 노점상들. 닭꼬치, 생화, 캐릭터 피규어, 잠옷까지 얼핏 종합 쇼핑몰을 연상케하는 노점들을 옆눈으로 훑으며 집으로 향하던 나는 한 꽃가게 앞에 선 평범한 남자를 마주쳤다.


그 남자는 검은색과 남색의 중간쯤 되는 애매한 색깔의 무릎까지 오는 코트를 입고 있어 시베리아 한파를 막기에는 꽤나 부실한 옷차림이었고, 검은테 안경을 썼으며, 손에 별다른 짐은 들고 있지 않았다. 눈에 띌 것 없는 평범함으로 치장한 그가 꽃가게 앞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꽃을 사는 그의 옆얼굴을 조금 길게 쳐다보고 싶어졌다. 그 얼굴은 주황색과 흰색을 섞은 따뜻한 조명 아래 분홍, 하늘, 노랑, 색색의 빛을 뿜어내는 꽃들에 둘러싸여 한없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는 것은 지나치게 무례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표정을 3초 정도 겨우 바라보았다. 가게 주인은 그런 남자의 표정은 아랑곳 않고 매대를 가득 메운 꽃들을 하나하나 읊어가며 밝은 목소리로 구매를 권했다. 콘크리트 바닥에라도 꽃을 피워낼 것 같은 활기찬 표정의 꽃가게 주인의 말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 평범한 남자는 찡그린 표정을 바꿀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았다. 어딘가 급하게 가야 할 사람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것 같기도, 그럼에도 꽃을 반드시 사 가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혹은 짜증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산 꽃다발을 손에 든 채 그는 누구를 만나러 어디로 갔을까? 확신하건대 그는 분명 꽃다발을 받아든 그녀(혹은 그) 앞에서 환하게 웃음 지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직접 고른 꽃다발을 화를 내며 집어던지듯 건넬 사람은 없을 테니까. (꽃다발을 무기로 싸우는 게 아닌 이상) 꽃다발 앞에서는 이처럼 누군가의 분노도, 짜증도, 화도, 그리고 슬픔과 알 수 없는 공허함도 꽃잎과 줄기가 드리운 향기로운 그늘에 가려지고 만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은 어둠을 가리기 위해 오늘도 사람들은 자기만의 꽃다발을 산다. 꽃다발은 때로 근사한 레스토랑에서의 저녁 식사, 퇴근길 양손에 들린 치킨과 콜라 세트, 약속 없는 주말에 훌쩍 떠나는 드라이브가 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꽃다발로 치장한 웃음을 보이는 게 더 익숙한 사람들에게, 가끔씩은 자신의 울적함을 솔직하게 꺼내놓아도 좋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이 힘들고 지친 표정을 지을 때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그것을 외면하고 당신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꽃다발 뒤 향기로운 그늘에 가려진 당신의 어둠을 외면하고 싶지 않으리라는 뜻이다. 당신이 오늘 하루 감춰왔던 고단함과 먹먹함을 함께 나누어도 괜찮다. 가리고 감춰야 할 것이 많은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큼은 당신의 꽃다발을 치워주기 바란다. 그 뒤에 숨은 당신의 눈동자와 오롯이 마주할 때, 맞은편의 눈동자는 비로소 당신이 준비한 꽃다발의 향기를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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