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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비버 Oct 23. 2024

[뜨카] 쿠키를 보며 너를 떠올려

빵순이의 기억

가래떡을 보면 야들야들한 떡으로 만든 떡볶이가 떠오르고, 길바닥에 버려진 귤껍질을 보면 창고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는 다 먹지 못한 귤이 떠오르고, 또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통화 내용을 듣다 보면 오늘 아침 아무렇게나 던지고 나온 빨아야 할 블라우스가 생각이 난다. 나는 뇌과학자도, 철학자도, 세상을 바꿀 만한 위대한 이론을 펼칠 사람은 더더욱 아니지만, 인간의 기억이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반짝하고 나타난다. 그리고 그 예상치 못한 지점은 우연히 받아든 쿠키 하나였다.


이 기억의 출발점은 사실 내가 아니라 나와 아주 가까운 지인이다. 밀려드는 업무와 2주 전부터 다이어리에 적혀 있었지만 손대기 싫은 업무 사이, A에서 AZ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스프레드시트에 눈을 박고 있던 오후 시간,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그녀는 '빵순이'라는 별명-그녀 모르게 나 혼자서 몰래 부르는-을 붙여준 동료인데, 별명 그대로 빵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녀와 4년 가까운 시간 알고 지냈지만 제대로 밥다운 식사를 한 건 단 두 번에 불과했다. 항상 그녀는 내게 먼저 만나자며 연락을 해오는 상냥한 사람이었는데, 그 대사는 보통 두 가지 중에 하나였다. ‘차 한 잔 할까’, 혹은 ‘이번에 신상 베이커리를 찾았는데 그곳에 가보는 게 어때?’ 그래서 그녀에게서 얼굴이나 보자는 연락이 올 때면 나는 늘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켜서 근처에 새로 생긴 아니면 분위기 좋은 빵집을 찾는 게 당연해졌다. 빵은 식사가 아니다, 쌀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는 나지만 만나면 늘 웃음을 머금게 되는 그녀를 위해 한 끼 정도 빵으로 대신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베이커리 카페의 메뉴판을 뚫어지게 보며 최대한 배가 부를 만한 큼지막한 빵을 고르는 건 그녀가 애교로 봐주길 바라면서.


오후에 메시지가 날아온 그날도 그녀와 무슨 빵을 먹으러 가면 좋을까 고민하던 찰나, 그녀는 예상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지금 잠시 시간 돼? 예상치 못한 전개에 흥미를 느낀 나는 스프레드시트를 큰 모니터로 잠시 치워두고 그녀가 그다음에 꺼낼 말을 숨죽여 기다렸다. 괜찮으면 잠시 만날 수 있을까? 업무 시간에 비밀스러운 접선을 하자는 그녀의 이야기는 더더욱 내 눈을 반짝이게 했지만, 일단 너무 들뜬 티를 내면 안 되기 때문에 차분하게 이유를 물었다. 무슨 일 있어? 그녀가 열심히 메신저 창을 두드리는 것을 곁눈질하면서 스프레드시트에 의미 없는 마우스 클릭을 서너 번 더했을까. 그녀는 본론을 꺼냈다. 내가 쿠키를 하나 받았는데 이 쿠키를 보니까 네가 생각이 났어. 너에게 꼭 주고 싶은데 만날 수 있으면 지금 내가 너에게 갈게.


이 세상의 사랑을 어찌 규정할 수 있을까. 남성과 여성이 만나 이성적인 끌림에 의한 사랑도 있겠거니와, 업무 시간에 우연히 생긴 쿠키를 보면서 빵집 투어용 직장 동료를 떠올린다는 것도 거대한 사랑의 세계관에 충분히 편입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아, 오해할까 봐 미리 밝히자면 그녀는 이미 건장한 남성과 결혼을 한 기혼자이다. 휴대전화만 챙겨 들고 그녀를 만나러 그녀의 사무실 근처에 갔을 때, 그녀는 환한 웃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걸 보니까 네가 떠오르는데 꼭 너한테 주고 싶더라고. 와줘서 고마워. 사실 그녀가 건넨 쿠키에는 나를 떠올릴 만한 특별한 것이 없었다. 생소한 브랜드이기는 했지만 카페에서 한두 개씩 만들어 파는 동그랗고 누런 반죽에 초코칩이 콕콕 박혀 있는 평범한 쿠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어 보이는 그 쿠키를 보며 나를 생각했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붕붕 뜨며 구름을 걷고 있는 기분이 들 만큼 기뻤다.


인간의 기억이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어 흐르고 흘러 어떤 것에 닿아 펼쳐질지 알 수 없다. 만약 바쁘고 지겨운 일상 속에서 당신에게 누군가, 이걸 보니 네가 생각이 나서 연락했어, 라는 말을 한다면 당신도 그 사람을 향해 변함없는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기 바란다. 그 사람은 당신을 떠올렸다가도 급한 연락을 받아 그만 잊어버리거나, 어쩌면 당신에게 연락하는 것을 많이 망설였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그 사람의 연락이 닿았다는 것은, 그가 수많은 고민과 장애물을 거치고 넘어왔다는 뜻이다. 그 사람의 작지만 솔직한 진심을 따뜻한 마음으로 끌어안아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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