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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비버 Oct 23. 2024

[유강] 이따금씩 생각나는 사람

내 인생 첫 사수

가끔 김대리님 생각이 난다. 이제는 김과장님이려나? 어떻게 보면 내 인생 첫 사수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니 맞아. 내 인생 첫 사수는 김대리님이야. 김대리님이어야만 해.

첫만남은 이랬다. 시스템 접근권한도 없고 아직 아무것도 배우질 못해서 민원대에 가만히 앉아있던 나를 김대리님이 부르셨다. 

대리님 자리로 가니까 모니터에

♡ 유강 ♡

9/8~12/7

대충 이렇게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있더라고. 

인턴이 없는 동안에는 그 귀찮은 일을 대리님이 혼자 하셨으니 당연히 내가 반가우셨겠지만 아무튼! 너무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김대리님이 일을 자세하게 알려주시긴 했지만 이따금씩 팩스로 들어온 신청서 처리를 하다보면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전화번호가 없는 전화번호이거나 주민번호를 잘못 써서 제출했거나 뒷장을 아예 안 썼거나 등등. 이런 경우에 혼자서 이것저것 시도해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으면 대리님께 여쭤보거나 다른 담당자분들께 여쭤보곤 했다. 다들 한 번도 귀찮은 티를 내지 않으셨고 친절하게 도와주셨다.


인턴이 끝나기 직전, 김대리님이 일부러 나를 출장에 데려가 주셨다. 점심도 사주시고 카페도 데려가 주셨다. 그리고 카페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다른 주임님들한테 설명을 듣는 모습을 볼 때마다 답답하셨다고.


유강씨 저거 다 아는데!! 유강씨 저거 다 시도해보고 질문하는 건데!! 좀 더 아는 티를 내 유강씨!! 하면서 옆자리 과장님께 말씀하셨다고 한다.


확실히 그러긴 했다. 이미 다 시도해본 방법인데 그 방법으로 시도해보라고 하시면 아 그것도 해봤는데... 하면서 이러이러해서 해결을 못 했다고 말씀드린 경우가 많았고, 보통 그런 경우엔 담당자분이 직접 처리해야 하는 경우였다.


그때는 대리님 말씀이 잘 와닿지가 않았는데, 입사하고 얼마 안 돼서 깨달았다. 티를 내지 않으면 내가 아무 고민도 없이 질문하는 걸로 보일 수 있겠구나. 그래도 난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입사 초기의 내 노력은 기존 직원이 보기에는 아주 작은 노력이다. 이제는 대강 알지. 어디에 들어가서 어떤 문서를 찾아보고 어떤 규정을 검색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답이 나온다는 걸. 하지만 당시에는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묻기 전에 먼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고, 고민하다가 물어보면 찾아보지도 않고 질문을 한다고 했으니까.


거의 매일 동기들한테 메신저로 SOS를 쳐야했다. 이런 자료요구가 왔는데 이거 그쪽 담당이 맞을까? 하면서. 언제는 이런 말을 들었다. "거기는 전임자가 그런 것도 안 알려줘요?" 비아냥대는 말투로 그러니까 당연히 기분이 나빴지. 근데 기분은 나쁜데... 공감이 되는 거야.


그러게요? 왜 안 알려줬을까요?


확실히 배경 설명이 필요한 케이스이긴 했다. 한 부서에서 담당하다가 부서가 쪼개져서 업무도 넘어갔는데 직제규정상에는 아직 남아있어서 어쩌구 저쩌구...


내가 전임자였어도 안 알려줬을까? 난 아마 알려줬을걸? 난 알려주는 거 좋아한다. 나는 누군가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싫다. 내가 아는 거면 물어보기 전에 먼저 가서 알려준다. 알려주는 거 좋아하니까 블로그도 하고 있지. 광고 수익이 목적이었으면 내 포스팅엔 의미없는 사진과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었을 거야. 글 쓰고 정보 공유하는 게 재밌으니까 수익이 안 나도 계속하는 거다.


회사에서 업무 관련 질문을 했다가 선배에게 혼이 날 때마다, 본인한테 말 걸기 전에는 파티션에 노크를 하라는 등의 지적을 받을 때마다, 김대리님 생각이 났다. 알바도 안 해봐서 사회생활이 처음이었던 인턴 시절의 나한테 지적할 점이 없었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끝까지 칭찬만 해주신 거지? 고민하다가 나중에는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좋게 봐주신 김대리님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내가 사수가 되어 인턴을 가르치게 되었을 때, 김대리님이 나에게 해주신 그대로 인턴을 대하려 노력했다. 이미 알려준 내용을 다시 물어보거나, 사소한 실수를 했을 때,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낸다고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어차피 나는 다시 알려줘야 하고, 별거 아닌 실수는 금방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인턴들이 퇴직하면서 나에게 건넨 편지에는 항상 화를 내지 않고 사소한 질문에도 정성껏 답변해주셔서 감사했다는 말이 담겨있었다. 난 사실 내 노력이 티가 안 날 줄 알았는데, 인턴들 편지 내용이 겹치는 걸 보니까 그래도 내 노력이 헛되진 않았구나 싶어서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쯤이면 내가 가르친 인턴들도 누군가의 사수가 되어있겠지? 내가 김대리님을 떠올리며 인턴들을 대했던 것처럼, 인턴 친구들도 후배들에게 좋은 사수가 되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대리님, 돌이켜보면 제가 정말 부족한 사람이었는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 자신을 믿고, 폭언에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어요. 제 인생의 첫 사수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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