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뻥이야. 울 엄마 지구인이야.
2월 17일은 내 생일이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생일날 친한 동기들이 단톡방에서 생일 축하를 해줬는데 한 명만 연락이 없었다. 원래 카톡을 안 하는 친구여서 나는 그 친구가 한동안 잠수를 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3월의 어느 저녁에 갑자기 카톡으로 생일에 연락을 못 해서 미안하다며 배스킨라빈스 기프티콘을 보내주었다. 카톡이 오기 전까지는 그 친구가 내 생일에 연락이 없었던 걸 모르고 있었기도 했고, 원래도 핸드폰을 거의 안 보는 친구라 서운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기프티콘을 주니 그저 감사히 받을 뿐이었다.(고마워 정민아! 보고싶다!)
우리 집 근처에는 배스킨라빈스가 없어서 오랫동안 기프티콘을 안 쓰고 있다가, 어느 날 밖에 나간 김에 배스킨라빈스에서 기프티콘을 쓰고 파인트 아이스크림으로 바꿔왔다. 내가 고른 맛은 엄마는 외계인, 초콜릿 무스, 그리고 밀크앤치즈쿠키(지금은 없는 당시 시즌 한정 메뉴). 이 중 엄마는 외계인은 내가 배스킨라빈스에 갈 때마다 무조건 골랐던 맛으로, 오늘은 이 '엄마는 외계인'에 얽힌 사연을 풀어보고자 한다.
- 정직하지 못했던 열다섯의 나 -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를 여럿 사귀었다. 원래는 두세 명하고만 친하게 지내는 편이었는데, 어쩌다가 인싸인 친구들을 사귀어서 9명이서 다녔다. 하루는 주말에 친구들과 모여 수다를 떠는데 갑자기 배스킨라빈스에서 무슨 맛을 제일 좋아하는지가 주제가 되었다.
난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열다섯의 나는 배스킨라빈스에 무슨 맛이 있는지 몰랐거든.
그렇다. 나는 그때까지 스스로 배스킨라빈스에 들어가서 아이스크림을 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아예 안 먹어본 건 아니었다. 아홉 살 생일에 TV 광고를 보고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졸라서 아빠가 사왔는데, 생각보다 너무 맛이 없었다. 온 가족이 깨작깨작 먹으니 케이크는 줄지를 않고... 엄마랑 아빠는 돈만 버렸다며 아이스크림 케이크는 다시는 먹지 말자고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맛이 없음 + 내가 먹고 싶다고 했으니 내가 다 먹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의 콜라보로 아홉 살의 어린 나는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게 약간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그 이후로 배스킨라빈스에서 뭘 사달라고 한 적도, 내가 직접 배스킨라빈스에 가서 뭘 사먹어 본 적도 없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용돈이 적어서 내 돈으로 사먹는 건 사치이기도 했어.
아무튼 그래서 내 차례가 돌아오면 뭐라고 대답할지 생각하는데, 친구들 대부분이 엄마는 외계인이 제일 좋다는 대답을 했다. 아이스크림에 들어있는 과자가 맛있어서 좋다고 하면서.
분명 처음에는 그냥 솔직하게 배스킨라빈스에 무슨 맛이 있는지 모른다고 하려 했는데, 갑자기 친구들이 유강이는? 하고 물어보니까 나도 모르게 엄마는 외계인을 좋아한다고 해버렸다.
왜 그랬지?
지금 생각해보면 배스킨라빈스에 안 가본 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열다섯의 나는 내가 배스킨라빈스에 가본 적이 없으며, 알고 있는 맛 또한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것 같다.
그렇게 친구들에게 "나도 엄마는 외계인이 제일 좋아^^;"라고 대답한 이후로 한동안 엄마는 외계인은 내가 아는 유일한 배스킨라빈스 메뉴가 되었고, 배스킨라빈스에 갈 때마다 무조건 엄마는 외계인을 고르게 되었다.
그냥 그걸 골라야 될 것 같아.
매번 고민을 하면서도 결국에는 엄마는 외계인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날도 엄마는 외계인을 골랐다.
그리고 그날 집에 돌아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깨달았다. 초콜릿 무스를 거의 다 먹어갈 동안 엄마는 외계인은 반도 줄지 않았다는 걸. 나는 엄마는 외계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그날 고른 세 가지 맛 중에 제일 맛이 없었던 엄마는 외계인.
나는 이런 애매한 초콜릿맛 안 좋아해. 달 거면 엄청 달든가 아니면 쓴맛 나는 초콜릿이든가 해야지 나한테는 너무 애매한 맛이다. 과자도 딱히 내 취향이 아니야.
그냥 솔직하게 모른다고 하고 친구들이랑 배스킨라빈스 가서 이것저것 먹어볼걸. 왜 그랬나 몰라. 그때 솔직하게 말을 했으면 어쩌면 나는 그날 배스킨라빈스에서 친구들이 고른 다양한 맛의 아이스크림을 한입씩 맛봤을지도 모른다. 착한 애들이라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먹어보라고 해줬을 거야. 어리석었던 열다섯의 유강, 나는 네가 부끄럽다.
정직하지 못했던 어린 유강의 거짓말을 반성하며... 이제 나는 배스킨라빈스에서 엄마는 외계인을 시키지 않는다. 대신에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 무스를 고르거나 먹어본 적은 없지만 왠지 맛있을 것 같은 맛을 고른다.
언제까지 좋아하지도 않는 엄마는 외계인을 먹을 수는 없으니까,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고, 생각없이 남의 의견 따라가지 말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계속해서 찾아갈 생각이다.
엄마는 외계인은 영원히 안녕이야. 울 엄마는 지구인이니까, 그건 거짓말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