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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비버 Oct 23. 2024

[뜨카] 그냥 다 괜찮아요

거창한 수식어는 필요 없어

“두려워 하지 마세요. 이혼해도 괜찮습니다. 이혼해도 세상 무너지지 않아요.”


드라마(<끝내주는 해결사>, JTBC 2024) 속 캐릭터는 이혼을 망설이는 피해자에게 위로를 건넨다. 이혼을 해도 괜찮다고, 두려워하고 있는 그 길을 선택해도 당신의 인생이 엉망이 되지는 않는다고. 이혼에 대한 이야기를 할 건 아니고, 나는 이 대사 속 ‘괜찮다’는 말이 참 괜찮았다.


나는 가족들과 자주 만나고 매일 서로 안부 전화를 하며 한 해에 한 번쯤은 다같이 여행을 간다. 나와 가족들을 두고 사람들은 가족 사이가 무척 화목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내가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것 같다며 칭찬한다.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게 맞다. 그러면 남들도 다 아는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냐고?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는 건, 남들은 잘 모르는 이야기다.


먼저, 나의 부모님이 내가 사랑 받을 만한 자격과 능력이 없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건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어릴 적부터 한번도 부모님이 내게 험한 말을 하거나 학대를 한 적은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는 모르겠으나 나는 늘 조건 없는 사랑은 없을 거라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 이야기를 꺼내자니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초등학생 때쯤, 학교에서 매주 아침마다 보는 한글 받아쓰기 시험이 있었다. 나는 유치원에서 한글을 다 떼고 학교에 갔기 때문에 받아쓰기 시험을 늘 잘 봤다. 하루는 10개 중에 8개인가 9개를 맞아 신이 난 기분으로 집에 가서 부모님께 자랑을 늘어놓았다. 어린 마음에 아마 네가 세상에서 한글을 제일 잘 안다는 거창한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자랑스레 내민 받아쓰기 시험지를 보고 아빠는 딱 한 마디 했다. 100점 못 받았네, 더 열심히 해라. 100점을 받지 못해서 나는 부모님을 실망시켰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과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맞설 때면, 부모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때 가끔 마트에 가서 먹고 싶은 과자를 고를 때도 내가 원하는 것을 입밖에 내본 적이 별로 없다. 내가 선택했을 때 엄마가 좋아할 만한 것이 우선이었다. 엄마가 좋아하시는 것도 내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 내가 스스로 골랐다고 여길 때 엄마가 흡족해할 만한 선택. 그게 늘 나의 선택이었다.


나이가 들면서는 나도 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부모님도 그 부분은 많이 존중해주셨다.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지 않던 나만의 취향과 선호가 갑자기 생기지는 않았다. 아직도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무엇인지, 가장 싫어하는 색깔은 무슨 빛인지, 산을 좋아하는지 바다를 좋아하는지 잘 모른다.


대학에 진학하고 이후 직장 생활까지 하고 있지만, 나는 그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학교에서 만난 선배와 후배, 직장에서 하루종일 시간을 같이 보내는 동료, 팀의 상급자들…. 나와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나를 좋아해주고 아껴주는 사람을 만나면 스물스물 불안감이 몰려온다.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얼지 생각하고, 그 이유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에 드는 나를 보여주려 노력한다. 저 사람이 몰랐던 나의 다른 모습까지 알게 되면 나를 떠날까 봐,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봐 불안해하면서. 


직장과 직업에 있어서도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지금보다 더 낫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지금보다 돈을 더 벌어야 하는 게 아닐까, 사회적으로 더 인정 받는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닐까. 현재의 삶이 불만족스럽지 않음에도 나는 늘 현재에 머물기보다는 미래를 본다. 마음이 미래에 있으니 불안하지 않을 리 없다. 최근 들어 직장에 대한 고민이 커지면서 문득 그때 그 어린 시절이 생각 났다. 끊임없이 모든 선택과 성취를 남의 기준에 맞추려고 했던 그때.


생각해 보면 한글 받아쓰기 시험에서 100점을 받지 못했다는 아빠의 말보다는, 2개밖에 틀리지 않은 나 자신을 스스로 대견해하면 되는 것이었고, 마트에서 엄마가 기특하게 여기는 과자를 고르지 않고 짠맛이 가득한 감자칩을 사도 엄마는 나를 미워하지 않을 것이었다. 학교와 사회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내게서 좋지 않은 모습을 발견한 사람은 그저 그렇게 내 곁을 떠나도록 흘려 보냈어도 되는 것이었다. 사실, 그냥 다 괜찮았다.


이혼을 척척 해결해주는 슈퍼 히어로가 등장하는 그 드라마 속 대사처럼, 너 있는 그대로 다 괜찮다고,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너는 사랑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그런 이야기가 듣고 싶다. 그리고 내가 그런 이야기가 듣고 싶은 만큼 먼저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가장 소중한 나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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